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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시대를 녹인 건 사람의 온기였다

tvN <태풍상사(2025)>

by 양보

바람이 달라졌다. 손끝이 시리고, 버스 창문은 안팎의 온도 차에 뿌옇게 변해 간다. 온기가 필요한 계절이다. 추울 때 미약해 보이는 작은 손난로조차 큰 따스함을 준다. 그렇다면 거대한 추위 앞에는 얼마나 큰 온기가 필요할까?


1997년, 대한민국 경제에 매서운 한파가 몰아쳤다. 90년대 초반까지 고속 성장을 달려왔지만, 과도한 기업 부채와 금융권 리스크, 외환 유출 위협 등 불안한 지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1997년, 국가 부도 위기를 막고자 IMF(국제통화기금)와 구제금융 협정을 맺었다. 사실상 큰 빚을 진 셈이었다. 이후 한국 경제성장률은 급락하고, 실업과 기업 부도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드라마 〈태풍상사〉(2025, tvN) 는 당시 꽁꽁 얼어붙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태풍상사는 중소기업 상도 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했으나, IMF 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더욱이 강진영 사장(성동일 분)은 IMF 직전 사비를 들여 큰 규모의 원단을 수입했다. 경기는 호황이었으나 오래 회사를 운영해 온 그는 무언가 어긋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거래가 성공하면 원단 시장에서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궁극적으로는 태풍상사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나라가 부도 직전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무리하게 진행된 수입은 천재지변 같은 국가 위기 앞에 태풍상사도, 강 사장도 쓰러트리고 만다. 그리고 강 사장은 다시 깨어나지 못 했다.


갑작스레 아버지를 잃은 태풍(이준호 분)은 슬픔을 달랠 틈도 없이 채권자들에게 시달린다. 아버지의 사무실을 정리하던 중, 그는 금고 깊숙히 놓인 여러개의 통장을 발견한다. 차선택 차장 이름이 적힌 통장에는 ‘자녀 유학비’, 오미선 경리 이름이 적힌 통장은 ‘대학 입학비’라고 적혀 있었다. 강 사장이 직원들의 꿈을 응원하며 부어온 적금 통장 중에는 ‘태풍의 소원권’이라는 이름의 통장도 있었다. 아들의 꿈을 응원하고 싶던 아버지의 마음처럼, 직원들을 아꼈던 강 사장의 경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모든 직원이 떠났고, 회사는 폐업신고만 남았다. 하지만 태풍은 사장을 자신으로 변경하고, 오미선 경리에게 남아줄 것을 부탁한다. 아버지의 20년 세월이 담긴 회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선도 태풍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차선택 차장을 통해 다른 회사로 갈 수 있었지만, 상사맨이 되고 싶다는 꿈과 태풍상사에 대한 애정이 불안한 현실을 뛰어넘게 했다.


그 시절에는 이런 낭만이 넘쳐났다. 생각해 보면 당시 국민들은 비상금으로 모아온 금붙이를 꺼내 나라를 살렸다. 경제는 삭막했을지 몰라도, 이웃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는 인정(人情) 이 있었다. 이웃의 아이를 함께 돌보고, 콩 한 쪽도 나눴다.


태풍도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상황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모른 척 하지 않았다. ‘표상선(무역회사)’의 방해로 어렵게 따낸 수출이 가로막혔을 때, 태풍은 기지를 발휘해 화물선이 아닌 원양어선을 통해 신발을 밀항(?) 시키기로 한다. 부산에 빠삭한 정차란(김혜은 분)의 도움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강 사장이 오랜 시간 나누어 온 인정 덕분이었다. 사채업자에게 죽어가던 ‘슈박’ 사장까지 끌어안으며 위험을 감수하는 태풍의 모습은 사람을 얻는 장사를 해오던 아버지를 닮았다. 그렇게 태풍은 힘들지만 모두와 함께 하나씩 성공을 이뤄 간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동은 ‘성공’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태풍의 “쪼”이자,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카타르시스다.


반면 표상사의 표현준(무진성 분)은 상사맨으로 일하며 아버지 표박호(김상호 분)의 말처럼 “실패는 돈이 된다”고 믿는다. 담보로 잡힌 물건을 찾으러 온 거래처 사장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 물건을 부숴 버린다. 그가 부순 건 단순히 물건이 아니다. IMF 여파로 사방으로 돈을 빌려가며 버텼을 사장의 절박함, 함께 일하던 직원들과 가족들의 생계까지 한순간에 무너뜨린 것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사람을 잃는 장사를 한다.


반대로 태풍의 주변은 다르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 쫓겨난 태풍 모자에게 미선은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준다. 그 집에서 태풍의 어머니 정정미(김지영 분)는 미선의 막내 동생 오범(권은성 분)을 막내 아들처럼 챙기고, 치매에 걸린 염분이(김영옥 분)를 어머니처럼 모신다. 태풍상사 직원들은 퇴직금이라며 준 그간 강 사장이 부어온 예금통장을 거절한다. 슈박 대표(진선규 분)가 원양 어선에 올라 신발을 배송하는 동안 정차란은 그의 딸을 돌보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낭만은 다 디졌어도 인정은 남아 있어야 될 거 아이가.” 그의 주변은 항상 넘치는 인정으로 따뜻했다.


1997년. 그때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온 것 같지 않은데, 그 사이 너무 많은 것이 빨리 변해버렸다. 그래서인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듯 느껴진다. 드라마에서조차 사람이 사람으로 인해 위안을 얻는 따뜻한 이야기가 너무도 오랜만이다. 그래서 드라마 <태풍상사>가 사랑 받는 게 아닐가? 우리는 서로의 온기 속에 봄을 맞이하니까. 그 추운 대한민국의 겨울을 4년만에 이겨내고 맞이한 봄처럼. 나라를 살리고, 삶을 살아내겠다는 뜨거운 의지가 만든 기적은 실은 서로를 향한 온기, 인정(人情)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도 니 쪼대로 살아래이. 돈도 없고 뭣도 없어도 옆에 사람 있으면 된다. 지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케도, 그 세상 살아가는 기 사람이라는 거는 똑같다 아이가.”

서로를 돕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글 도입부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거대한 추위 앞에는 얼마나 큰 온기가 필요할까? 나는 온기의 ‘크기’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결론에 닿았다.


인정(人情). 그것은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는 따뜻함이 둥글게 맞잡은 손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온정(溫情)이 되고 우리는 함께 놓이게 된다. 작고 부족해 보여도 누군가로부터 시작된다면, 그리고 그 온기를 이어갈 마음이 있다면, 거대한 추위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크기보다 중요한 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유무(有無)일지도.


어려운 시절,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아주 작더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내일이 있다는 작은 신호 같은 것. ’ 드라마 〈태풍상사〉 는 그 마음이 만들어 내는 온기의 드라마로, 우리에게 오래 남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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