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평생 남지만, 나도 남는다
일주일 전, 다니던 병원이 문을 닫았다. 동료들과 함께 샤브샤브 집에서 회식을 했다.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어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새늘 선생님 처음 봤을 때 얼굴에 그늘이 있었어."
이윽고 다른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알고 있어. 새늘이는 가족적 결함이 있다는 걸."
그 선생님의 말에 듣고 있던 다른 선생님들이 물었다.
"정말이에요?"
나는 대답했다.
"네. 엄마 아빠는 이혼했고, 저는 할머니랑 같이 살았어요. 아빠는 재혼해서 새엄마와의 사이에 자식이 둘 있어요."
처음이었다. 담담하게 내 결핍을 이야기했던 순간이.
직장에서 나는 꽤 밝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밤근무를 전담하던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내심 놀랐고, 깨달았다. 아무리 밝게 웃어도, 얼굴 한켠에 어딘가 흐릿한 그림자가 남는다는 걸.
일종의 커밍아웃이었다. 나는 철저히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한 발짝 물러나있었고, 명절 때 "집에는 안 가?" 물어보면, "가면 친척들한테 시달려서 안 가요."라고 다음에 들려올 말을 막았다. 그러나 내가 그런다고 해서 남들이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엄마나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나조차도 그럴 테니까.
언젠가는 말하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날이라는 것은 몰랐다. 티를 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내 고백에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그저 끄덕였다. 그 끝에 밤 근무 선생님이 말했다.
"잘 컸네요. 잘 컸어."
고백을 하면 늘 듣는 말이지만,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런 과정과 결과는 반복될 것이다. 다른 직장에 가도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알면서도 모른척 할 것이다. 어쩌다가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늘 언젠가는 자신의 가슴을 바늘로 찌를 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내 현실이고, 이혼 가정이 낳은 덫이었다.
그들이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는데도 내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너무 오래, 깊게 박혀서 뿌리를 뽑을 수 없는 못이 되었다. 그냥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그저 '나'로 살 것이다. 여자, 간호사, 누군가의 여자친구, 누군가의 동료로 남들처럼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제는 이 상처를 굳이 극복하려 들지도, 더 이상 스스로를 연민하지도 않겠다. 한계가 오면 부딪치며 넘길 뿐이다. 어쩌면 '이혼가정의 자녀'라는 이름조차, 결국 내가 나에게 붙인 족쇄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