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일기

07_ 기억의 연기

by 활짝

그림 일기를 꾸준히 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전반적으로는 내 게으름 탓이지만 핑계를 좀 대자면 방학이 일시 중지된 부분도 있다. 작년에 많은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몇개월의 직업적 프로젝트, 그 사이 제주에서의 한 달, 몇개월의 내적 방황과 몇개월의 개인적 프로젝트로 2018년이 지나갔다.

때때로 마음을 적어나가면서 작년 한 해를 되돌아볼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 같다. 더 늦기전에 흐려지는 기억에 마음을 보태는 기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렇게라도 깨달은 지금이 감사하다, 연기라고 해두자.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죄책감과 일종의 불안감으로 2018년도 하반기에는 우리집을 DYI로 고치며 시간을 보냈다. 필요한 일이었다는 당위성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육체노동에 집중하고 에너지를 소진하면 상실감과 불안함을 느낄 틈이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다른 생각을 할 정신 없이 쓰러져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사물은, 적어도 내가 소유한 것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컨트롤할 수 없을 때 오는 무력감이 내가 극복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남는 것 같기도 하다. 집을 계획대로 바꾸고 만들면서 적어도 내가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 하며, 추진하고 실행하는 내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셀프인테리어를 하기로 결정하고 실행하기 전 약 세달 정도의 기간동안 나는 밤마다 울었다.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실연 후에 크게 상심하고 한달 정도 눈물로 시간을 보낸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몇개월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한 상태로 보내는 일은 처음이었다. 두려웠고, 뭐든 해야 했다.

명확하지 않는 관계를 정리하고자 했던 이유는 그 명확하지 않음 때문이었다. 2017년도 연말에 어쩌면 조금은 충동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정리를 선언했고 괜찮을 줄 알았다. 꽤 오랜기간 의지한 사람이었지만 행동하지 않는 그를 의심했다. 그 어떤 이유로도 결국엔 행동하지 않을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2015년도 초에 이미 끝이 난 관계였다. 큰 상실감을 겪으면서 나는 일에 몰두했고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였다. 나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그가 의지되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렇게 서로 마음이 깊어지면 그를 행동하게 만들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와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동시에 지쳐갔다. 그는 항상 내 생각보다 너무 느렸고, 얼마나 더 기다려야할지 알 수 없었다. 결정적인 사건 따윈 없었다. 나는 아팠고, 몸이 아프면서 관계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상처받았고, 우리는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일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됐을 때, 그는 재확인을 원했고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확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흔들렸고, 그도 그런 줄 알았다. 감정의 동요는 있었지만 결국에 변한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또 다시 낙담했다. 그리고 이번엔 달랐다. 최선을 다해 울고불고 고집도 부려보고 설득도 해보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2017년도에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 미친듯한 업무에 시달렸던 나는 2018년도에는 최소의 일만 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 먹었다. 결과적으로 상반기에 프로젝트를 하나 마무리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 프로젝트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개입되었고 평소보다는 덜 열정적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감정이 정리됐다고 믿었고, 일을 마무리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못이겨 선택했던 일이다. 늘 그래왔듯 프로젝트의 과정과 내 역할은 명확하지 않았고, 이성과 감정이 충돌했다. 마무리는 나쁘지 않았지만 과정이 아름답진 않았다. 어쩌면 책임감을 회피하고 선택하지 말았어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상반기에 제주에서 보낸한 달은 소소하고 다양한 만남을 경험하게 했다. 친한 언니의 결혼식을 명분 삼아 한동안 갑갑했던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새로 들어온 프로젝트도 마다하고 나는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택했다. 지금도 그 선택은 후회하지 않는다.

조용히 지내고 싶었지만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었다. 큰 사회던 작은 사회던, 어딘가 소속되는 일에는 관계가 따른다.

벌써 1년이 지난 일이되었지만 제주에서의 평온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위로를 받는다. 매일 같아보이지만 다른 풍경과 날씨, 2주 동안 매일 마주치던 얼굴도 있었고, 2~3일 마다 바뀌던 얼굴도 있었다. 고양이를 데리고왔던 낯선 언니들과 보냈던 시간들도 기억나고 부끄러움이 많은 숙소 사장님도 생각난다. 낯선 이들에게 적당히 마음을 열고, 적정선의 관계를 유지하며 안정감을 느낀 시기였다.




올해는 정말로 아무 일이 없는 백수생활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상반기에 시작한 일은 운동과 뜨개질뿐이다. 운동을 하며 내 몸을 돌보고, 근육이 늘어나는 느낌을 받으며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게 즐겁다. 뜨개질은 꾸준히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요한 것을 만들고, 생활에서 사용하면서 혹은 주변에 선물하면서 보람을 느끼게 해준다.

여전히 가끔씩 일을 해야하지 않나 하는 불안감으로, 때로는 본업으로 돌아가야하는 시기를 놓칠까봐 두려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3개월이 넘게 꾸준히 하고 있는 이 운동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여전히 망설이는 중이다. 2월에 시작한 일기를 이렇게 몇개월만에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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