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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먼리 Jan 29. 2024

엄마 이해하기 (시어머니 편) EP1.

EP1. 우리 어머님은 좀 다른 시어머니인 줄 알았다, 같이 살기 전까지


“엄마 이해하기”는 30대의 엄마가 된 딸(그리고 며느리)이 두 엄마(친정엄마,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겪은 다양한 일화를 각색한 글입니다. 나도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우리 엄마만 이해하기 어려운 줄 알았더니, 시어머니는 더 어렵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때로는 화가 나고, 때로는 한숨이 나고, 또  때로는 눈물이 납니다.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엄마는 나를 잘 키워내기 위해 젊음을 다 바쳤고, 이제는 나와 나의 아이를 위해 또 한차례 본인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헌신하고 계십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엄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시’라는 글자는 우리 사회에서 관념적으로 그리 좋지 않은 프레임에 씌워져 있다. (‘시’ : ‘남편의’라는 뜻에서 유래) 변질된 유교 사상과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에 종속되어 살아온 우리 부모님 세대에 씌워진 프레임일 것이다. 시댁(시가), 시어머니, 시누이 등등 소위 ‘시’ 자들의 말도 안 되는 갑질은 드라마,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며, 우스갯소리로 현실은 더 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어머니’ 프레임은 엄청나다. (계속 프레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사실 이 것은 결코 일반화시킬 수 없는 일부의 의견 혹은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귀하게 키운 내 아들, 아니 혹여 본인은 대충 키운 내 아들일지라도, 며느리는 내 아들을 더 귀히 여겨주길 바란다. 사실 이렇게 예쁘게 포장한 문장이 내 아들‘만’으로 바뀌는 순간 무례한 갑질과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도’ 누군가의 귀한 딸이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내 아들‘만’ 귀하게 여기지 말고, 내 아들‘도’ 내 며느리‘도’ 귀하게 여겨주면 좋으련만 …


그러나 나는 ‘시’ 프레임에 당최 동의할 수없었다. 남편과 연애하는 동안 종종 뵈었던 어머님은 참 따뜻하고 포근한 분이셨다. 사람이 꼬인 데가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본받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 엄마보다 더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연애하던 그 시절 나는 연고가 없는 곳에서 자취 중이었는데, 어머님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나에게 밑반찬이나 과일 등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셨다. 내가 주말 근무가 있거나 외곽으로 나들이를 갈 때 남편은 종종 도시락을 싸 오곤 했었는데, 그 정성에도 분명 어머님이 한 손 더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편의 김밥은 내가 먹어본 김밥 중 가장 맛있는 김밥이었기 때문이다.

연애 기간이 한참 지난 후 왕래가 생긴 후에도, 아무것도 재거나 따지지 않고 마냥 예뻐해 주셨다. 본인은 딸이 없어서, 나처럼 작고 예쁜 아이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시다 하셨다. (나는 작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항상 그리 말씀하셨다.)

결혼을 하고서도 그랬다. 여전히 예뻐하셨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셨다. 서로 너무 애쓰며 살지 말자 하셨고, 시댁에 가면 그저 편히 쉬라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셨다. 우리끼리 잘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 하시며 남편에게도 늘 힘든 일은 네가 해라 하셨고, 맞벌이하는 며느리를 늘 안쓰러워했다.


누가 물어도 나는 ‘우리 어머님은 다른 시어머니들과 달라’라고 말했다. 시댁이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부자인 가족이었고, 특히 어머님은 수수한 꽃 같으신 분이었다. 그래서 난 ‘시’ 복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맞벌이 부부였고, 나는 육아로 인해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고, 내 커리어를 끊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엄마도, 시어머니도 육아를 도와주실 수 있다 하셨고, 첫째 육아는 친정 엄마가 함께 했다. (엄마와의 이야기는, 친정엄마 편으로 차후 풀어볼 것이다. 만 3년을 넘는 시간을 엄마와 보내고, 둘째가 태어나면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엄마를 보내고 시어머니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났다.


어머님과 함께한 지 고작 1개월 만에, 앞서 여러 문단으로 구구절절 아름답게 나열하면서 외친 ’우리 어머님은 다른 시어머니들과 달라’라는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우리 어머님도 시어머니였다. 몰랐다, 같이 살기 전까진 ….


 우와,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었다. 우리가 다름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부터, 말로만 듣던 그 ‘시’ 자 갑질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남편은 그것을 ‘시애미질’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막장 드라마 스토리까지는 아니었지만, 가랑비에 옷이 흠뻑 젖는다고 했던가, 똑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도 뚫린다고 했던가, 아무쪼록 나는 어머님의 알 수 없는 행동들에 점점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내가 알던 꽃 같던, 본받고 싶던 우리 어머님은 어디로 갔을까?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 어머님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며느리가, 내가 알던 며느리가 아니야. 몰랐어, 같이 살기 전까지 …


같이 살기 전까지 몰랐던, 같이 살다 보니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우리. 이해하기 어렵지만 함께하는 세월이 쌓이면서 비로소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 며느리와 시어머니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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