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할머니는 가수인가 봐요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두 돌이 겨우 지난 우리 아이가 이 요상한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 나나(둘째 아이), 그게 무슨 노래야?”
“할머니가 부르는 거예요.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나는 그 노래를 처음 들어보았으나, 나나가 어머님의 스마트폰 유튜브 화면에 코를 박고 푹 빠져있는 것을
보고 곧 알게 되었다. 임영웅이었다.
처음에는 아이의 혀 짧은 발음으로 트로트를 부르는 게 너무 귀여웠고, 요상하게 중독성 있는 그 노랫말이 너무 웃겨서 깔깔거렸다. ‘잘한다 잘한다, 귀엽다 귀엽다’하며 아이를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뒤, ‘터벅터벅 그 걸음으로 어느 세월에 내게 오나요, 저 푸른 하늘 새들처럼 날개를 달고 와야죠’까지 흥얼거리는 아이를 보니 별안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다른 아이들은 밝고 희망찬 동요 배울 시기에 우리 아이는 트로트가 웬 말이야. 저, 저 인생에 푹 찌든 노래 가사, 뽕필 가득한 쿵짝쿵짝 리듬 … 이 쪼꼬만 게 벌써 저런 거에 녹아들면 어쩌자는 거야.’
한번 삐뚤어진 시선은 시간이 갈수록 더 삐뚤어지기만 했다.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애한테 무슨 노래를 들려주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건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생각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끔 예고 없이 일찍 귀가한 날이면, 현관에서부터 트로트 한 자락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처롭고 절절하거나 또 신명 나서 들썩거리는 뭐 그런 다양한 종류의 트로트였다. 유튜브 볼륨을 최대치로 해놓고 목청껏 따라 부르고 계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집에 있을 때도 종종 그랬다. 트로트에 심취해 방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가 은근히 거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도 어머님 노래 실력이 꽤 출중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며느리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신가?‘ 혼자 계실 때야 흥에 못 이겨 그러신다 한들, 다른 가족, 특히 아들 내외와 어린 손주들, 앞에서까지 그
흥을 표현하시는 게 나로선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트로트(정확히는 어머님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그 노래들)에 날을 세우고 있던 어느 날, 트로트 가수를 선발하는 유명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고 난 후, 갑자기 어머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나에게만 풀어보는 이야기라 하셨다.
어머님은 줄줄이 동생들이 딸린 시골집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 시절 장녀는 귀한 내 딸이 아니라 살림 밑천이라고 했다. 어머님의 엄마는 계집아이가 많이 알아봤자 집안에 큰 소리만 낸다며, 어릴 적부터 온갖 집안일과 허드레 일을 어머님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공부를 못 했다고 했다. 무식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배움을 길게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가방끈이 짧지”라며 가끔 멋쩍은 웃음을 지으신다. 학교에 가기 전부터 동생들 밥도 해먹이고 빨래도 하고 똥기저귀도 갈고 … 추운 날 못에서 지게로 물도 길어오고, 아궁이에 불도 피우고 그랬단다. 무슨 70년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를, 여전히 눈에 생생하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가끔 둘이 있게 되면 옛날이야기를 자주 하시는 데, 그럴 때 우리 어머님은 소녀가 된다. 어머님이 학업을 못 마치며 뒷바라지 한 동생들은 다행히도 모두 가방끈이 길다. 똑같이 계집아이였던 여동생은 그 시절 흔치 않게 서울로 유학 간 여대생이 되었고, 집안의 온갖 귀한 대접을 독차지한 장남도 서울 명문대에 합격했다. 그리고 아래 동생들도 줄줄이 밥벌이를 할 수 있을만한 적당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동생들이 다 잘 되어서 어머님이 보람을 느끼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어머님은 항상 헛헛해 보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은 목청이 좋았다고 한다. 여자애가 목소리가 크다고 동네 어르신들은 무슨 계집애가 사내보다 드세다며 혀를 내둘렀다 했다. 어머님의 부모님은 어머님의 큰 목소리와 큰 몸집으로 사내아이처럼 일 해주길 바랐고, 가끔 장에 데려가 장사를 돕게 했다. 학교에 가는 날 보다 장에 가는 날이 많았던 어린 여자아이는 어느 날 장에서 이름 모를 가수의 ‘무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무대 한가운데서 노래를 뽑아내는 그 ‘가수’의 자태에 홀딱 반해버렸다고 한다. 그 가수가 누군지 몰라도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보였고 동시에 부러웠다고 했다. 그날 어머님의 꿈이 생겼다고 한다. ‘가수’. 너무나 놀라웠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온 우리 어머님에게 가수가 꿈인 시절이 있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란 것은 그 뒷말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꿈은 변한 적이 없어.”
그 말 한마디에 내 몸의 온 신경이 반응했다. 60세를 훌쩍 넘긴 어머님의 입에서, 꿈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도 생경했는데, 그 꿈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니…. 여전히 꿈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니…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리스펙트. 요즘 말로 리스펙트’가 딱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나에게 꿈이 뭐냐 물으면 사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때 꿈이 뭐였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다. 돌이켜보니,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꿈이라고 할만한 게 내 인생에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30대의 젊은 나도 찾지 못한 답을, 어머님은 60년 동안 품고 계셨던 것이다.
50대가 될 때까지 어머님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가수가 꿈이었단 이야기는 언감생심, 가족들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본 헛헛함은 그 때문인 것 같았다. 동생들과 자식들을 다 키워놓고 자유의 몸이 된 후에야 처음으로 친구분들과 라이브카페에 가보셨고, 친구분들의 성화에 처음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해보셨다고 했다. (죄송스럽게도) 지금은 또 손주들을 돌보느라 즐기면서 살 여유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라이브 무대에 선 그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고, 노래 한 곡을 신나게 뽑아내고 나면 모든 고민과 걱정이 한방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고 하신다. 삶의 무게에 감히 가수가 되어볼 생각은 못하셨지만, 삶의 무게에서 벗어난 노년이 되어서야 아주 소박하게 본인의 꿈을 맛보기 한 것이다.
나 또한 그제야 삐뚤어진 마음에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들네 집에 와서 까지 물색없이 노래를 불러대는 이유는, 어머님의 일상 속에서 진심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이 어머님 스스로가 진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 아닐까.
당장 동네 문화센터의 노래교실을 끊어드렸다. 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을까…. 노래교실 접수 소식을 듣고 어머님의 표정이 붉게 상기되었다. 한때 내가 꽃 같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었다. 이제는 노래교실의 우수 수강생이 된 어머님은 매 시간 앞에 나가서 한 곡씩 뽑으신다고 한다. 선생님과 수강생 동료들의 무한 칭찬과 지지를 받으며, 이미 그곳에서는 가수 여사님으로 불리신다. 아이 둘을 돌보느라 많이 지친 어머님이 노래교실 다녀오시는 날에는 훨씬 밝고 즐거워 보인다. 단전부터 끌어올려 신나게 노래를 뽑아내고 나면, 모든 체증이 다 가시는 것 같다며 소녀처럼 한껏 들떠 이야기하신다. “고마워, 노래교실에 가게 된 것이 내 스스로 가장 잘한 일 같아.”
가끔 노래를 너무 크게 들으시거나 부르실 때, 여전히 불편하고 싫은 순간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괜스레 엄마한테 눈치를 준다.
“시끄러워, 거 그만 좀 불러. 무슨 여기가 노래방인 줄 알아?”
“리리야, 너네 할머니 왜 저렇게 노래를 좋아하냐.”
리리가 대답한다.
“그러게요. 할머니는 맨날 노래만 불러요. 할머니는 가수인가 봐요.”
리리의 아무런 의도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대답에 그저 웃음이 났다.
그래, 할머니는 가수인가 봐.
동생들을 키우고, 자식들을 키우고, 그저 먹고살기 바빠 꿈을 찾아가지 못하신 우리 어머님. 그렇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꿈을 품고 계시기에 앞으로 남은 삶은 즐겁게 노래할 일이 많으셨으면 좋겠다. 집안에 트로트가 울려 퍼져도, 리리나 나나가 트로트를 따라 불러도, 어머님을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지 않을 자신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