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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부 Jul 28. 2020

오춘기 온 아내와 사춘기 온 딸

아내가 이상해졌다. 얼마 전에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밝은 노란색으로 염색하더니 요즘에는 20대 초반 여자들이 주로 가는 쇼핑몰에 가서 데일리 룩의 옷을 장바구니에 마구 담으신다. 택배 아저씨가 매일 우리 집에 방문하다 보니 어느덧 나의 얼굴을 알아버렸고, 밖에서 만나면 우리 집까지 가기 귀찮으시다고 내게 직접 소포를 건네주신다. 지금 아내는 두 딸들과 머리를 맞대고 바닥에 엎드려 어떤 코디가 서로에게 잘 어울릴지 토론하고 있다. 그리고, 주말만 되면 세명의 여자들은 바닥에 철퍼덕 둘러앉아 네일을 칠하고 수다를 떤다.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들어 나도 같이 껴본다.

딸, 아빠도 발톱에 빨간색으로 칠해줘

    

손톱에 바르고 밖에 돌아다니면 변태 취급당할까 차마 손톱에는 바르지는 못하겠고 발톱쯤이야 양말 신고 운동화 신으면 안보이니 아이들에게 기꺼이 발을 내어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신나 해 하면서 아빠의 발톱을 마루타 삼아 빨간색 매니큐어로 열심히 색칠 공부를 시작한다. (아빠 발톱은 커서 바르기 쉽다며 좋아한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친한 동생도 마흔에 사표를 내고 직장을 나왔다. 그 동생은 오랜 회사 생활로 인해 병을 얻고 어느 날 새벽 통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앰뷸런스 안에서 동생은 이렇게 생각했단다. '이렇게 살다가는 아이들보다 먼저 죽겠구나.'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그 동생은 사표를 던졌다. 그러자 동생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제수씨는 앞으로 우리 뭐 먹고 살 거냐면서 동생을 몰아붙였고, 사표를 던진 이후로 매일 바가지를 긁힌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사표 낸다고 아내에게 말했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굉장히 차분하고 내가 걱정된다는 얼굴을 하고 말이다.

자기 뜻대로 하세요

자기 뜻대로 하세요 뒤에 숨어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보았다. "자기 뜻대로 하세요" (관두기만 해 봐) 인지 "자기 뜻대로 하세요" (당신을 믿어요) 인지 헷갈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고민한 후 나는 당신을 믿어요를 선택했다.


사표를 내고 집에서 살림 사는 동안 아내는 평소보다 더 외모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사표 낸 시점 이후로 이런 변화가 오니 그녀의 변화로 인해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아내에게 남자라도 생긴 건가?' 하고 잠깐 지질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서 외모에 치중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최근에 가족 여행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조용히 아내가 옆에 와서 말했다.

자기야, 우리 여행 참 많이 다녔다. 그런데, 아이들 사진만 있고 우리 사진은 별로 찍은 게 없네, 그지?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 아내와 나는 세상의 중심이 자신에서 아이들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의 일상은 아이들 위주로 돌아갔다. 여행지를 정할 때도, 음식을 고를 때도 어느 곳에서 살지 선택할 때도 말이다.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자신을 지우고 아이들 위주로 살다 보니 우리 부부는 누구 엄마, 누구 아빠만 남았다.


생각해보니 결혼하기 전 아내는 꾸미는 것을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미용실에 자주 가서 머리를 하고 눈썹 정리를 했으며, 네일숍에 가서 네일 관리를 받았다. 그런데, 우리부부는 결혼을 하자마자 아이가 생겼다. 아내는 그때부터 뱃속 아이에게 영향을 줄까 봐 미용실을 끊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게 되면서 네일 관리도 받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내는 본인 옷도 사지 않고 아이들 옷과 인형을 사는 것에 더 행복을 느꼈다.


어느덧 두 딸들은 많이 자라서 혼자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는 이제 누구 엄마에서 원래 자신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아 보였다.


얼마 전 아버지를 모시고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다. 오랜만에 체중계에 몸무게를 재고(요즘 과자 많이 먹었더니 살쪘다) 안경과 옷을 다 벗고 아버지와 같이 목욕탕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아버지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보시며 말씀하셨다.

너 발톱이 왜 그 모양이냐?



'앗, 빨간색 매니큐어 지우는 것 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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