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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Dec 05. 2018

용기가 필요한 순간

때로는 거절당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학 시절 마케팅 수업에서 교수님이 패션 산업과 관련된 과제를 내주신 적 있다. 그때 내가 속했던 팀이 맡았던 주제는 자라, H&M, 유니클로와 같은 패스트패션에 관한 내용이었다. 관련된 자료를 찾기 위해 삼성경제연구소와 구글을 샅샅이 뒤졌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직접 설문조사를 해서 자료를 만들어야만 했다. 사람이 많은 주말에 명동이나 강남, 가로수길로 가서 각각 설문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난감했다. 일단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여간 막막한 게 아니었다. 신사역 8번 출구에서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만 보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저기요?"는 대답도 안 할 것 같았고, "안녕하세요? 저는 안녕합니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점점 이상해진다. 큰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처음이 어렵지 몇 번 하다 보면 금방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큰마음을 먹고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누가 봐도 수상한 표정과 어색한 손짓으로 간신히 말을 걸었다. 정말 보기 좋게, 그리고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물론 쉽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었지만 막상 거절을 당하자 충격이 상당했다. 시작부터 이렇게 처참하게 거절당하다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서 실패를 만회하려고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에게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 거절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너무도 냉랭하게 느껴졌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심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과거에 무언가에 도전했다가 처참하게 박살 난 기억들도 스멀스멀 떠올랐다.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듯 꾸역꾸역 설문을 시도하다가 내가 지금 길바닥에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싶었다. 이쯤하고 그만둘까. 아무리 생각해도 낯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내 체질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득 여기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포기해버리면 영영 못하겠다는 생각이 벼락처럼 머리를 때렸다. 그래서 그냥, 이 순간을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가로수길 곳곳을 다니면서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말을 걸듯 낯선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보를 촬영하고 있는 잡지사 직원들이든, 맛집 앞에서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든, 매장에서 옷을 고르고 있는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일단 눈을 마주치면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다가갔다. '뭐지? 이 신선한 느낌의 미친놈은?' 하는 눈빛으로 경계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나를 미친놈으로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안기로 했다. 그냥 슬쩍 웃으면서 한마디 툭 건넸다. 맡겨둔 돈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그러나 귀한 손님을 대하듯 친절하게. "패션 화보 촬영하시나 봐요? 혹시 제가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까요?" 안 괜찮단다. 그래서 잔뜩 실망한 말투로 그럼 이거라도 한 번 찍어주시라며 설문지를 쓱 들이밀어 봤다. 이게 뭐냐고 관심을 보이더니 흔쾌히 펜을 들었다. 처음으로 성공한 설문이었다.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다음에 또 봬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서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안되면 그만이니깐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마침 음식점 앞에서 줄을 선 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다리기 심심하시죠? 제가 시간 때우기 딱 좋은 콘텐츠를 들고 왔어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를걸요. 아마?" 정말 거짓말처럼 성공이다. 뿐만 아니라 뒤에 서있던 분들도 하고 싶다며 본인들이 먼저 설문지를 달라고 했다. 설문을 위해 내가 즐겨 가는 브랜드 매장에 들어갔다. 한창 옷을 고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슬며시 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브랜드 좋아하세요? 마침 제가 이 브랜드랑 관련된 설문을 하나 하고 있는데요. 잠깐이라도 좋으니 한 번 봐주시겠어요? 1분이면 충분해요." 사실 대충 해도 5분은 걸리지만 그분 반응이 호의적이셔서 곧바로 펜을 건네며 말했다. "빨간색 좋아하시나요? 실은 제가 빨간펜밖에 없거든요. 펜은 여기 있고, 질문은 이거예요." 그렇게 한 명씩 설문을 하다 보니 준비해 간 마흔 장의 설문지를 다 써버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다. 몸은 피곤했지만 설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경쾌했다. 정말이지 기분 좋은 하루였다.



생각해보면 조금 의아했다. 똑같은 설문인데 퉁명스럽게 거절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유쾌한 반응을 보이며 정성껏 설문에 응했던 사람들도 있었
다. 단순히 상대방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라면 매우 편리한 해석이 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른 결과를 만들었던 요인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내가 상대에게 자신감이 결여된 태도를 보였기에 신뢰를 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자신감은 결정적인 답이 아니었다. 자신감과는 상관없이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던 경우도 꽤 있었으며 성공을 자신하지 않았을 때 더 성공적인 설문을 하기도 했다. 내 경험에 비춰봐도 자신의 직업에서 큰 성공을 맛본 사람들을 여럿 만나봤지만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때문에 오히려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설문조사를 그저 사소하고 기계적인 업무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대방 역시 설문이란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귀찮은 일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나도 그렇고 상대방도 사소하고 귀찮은 일에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는 설문을 하는 내내 서로 웃으면서 설문과는 관련 없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며, 헤어지는 길에 내게 고생하라며 금박으로 포장된 달콤한 초콜릿을 건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눈 맞춤으로 시작된 우리의 사소한 대화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안면도 없는 사이였지만 나는 친근하고 솔직하게 내 생각과 감정을 전달했고, 상대방도 비슷한 톤으로 화답했다. 마치 탁구공을 주고받듯이 오고 가는 말을 통해 우리는 꽤나 유쾌한 경험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5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라켓 없는 탁구를 친 셈이었다. 어쩌면 설문조사는 그저 대화를 위한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일을 핑계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즐거울 수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나도 웃고 상대도 웃는 그런 순간들로 삶을 채워나가고 싶다고. 그런 경험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그것이 성공의 경험이어서가 아니라 함께 즐거웠던 경험이었기 때문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함께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거절을 무릅쓰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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