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최근 나는 AI의 도움을 받아 세 편의 글을 써보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글쓰기 실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꽤나 사적이고도 조용한 경험이었다. 나는 AI에게 내가 원하는 글의 결을 설명하고, 컨셉을 설정해주었다. 그러면 AI는 그에 맞춰 구조화된 초안을 가져왔다. 나는 그 구조를 보며 질문을 던지고, 혹은 방향을 조금 비틀고, 때로는 문장 한 줄의 온도를 조정했다. 그렇게 다듬고 리터칭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건 분명히 나의 글이다” 라는 감각이 밀려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는 이제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 보드리야르가 말했던 시뮬라크르의 세계와 많이 닮아 있다. AI가 쓴 글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나의 언어를 닮았지만 내가 직접 쓰지 않은 문장들, 그러나 결국 나의 마음에서 출발한 이야기들. 이 모호한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다.
조영남 '화투' 그림을 둘러싼 가작 논쟁.
조영남의 그림을 두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엇갈린 말을 해왔다.
“이건 진짜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그럼에도 작품이 지닌 정서와 메시지는 유효하다”는 시선. 진위와 감동의 비중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사람마다 달랐다.
하지만 그 둘 다 결국 작품이 건네는 감정의 일부이며,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작품이 가 닿은 세계의 반응일 것이다. 나에게도 AI와 함께 쓴 글이 그런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는 진위를 따질 것이고, 누군가는 '생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나 스스로 지닌 양가감정이기도 하니까.
사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글을 쓸 시간과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를 온전히 글에 쓰던 예전의 나는 이제 없었다. 퇴근하면 이미 몸과 마음이 고갈돼 있었고, 글쓰기는 점점 생활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희미해지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약 부작용으로 불면을 겪게 되었고, 그 긴긴 밤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AI가 ‘나’를 기반으로 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예전 같으면 한 편을 쓰기 위해 적어도 하루 이상의 시간을 꼬박 쏟아야했다. 하지만 최근 AI와 함께 만든 세 편의 글은 단 두 시간 남짓한 사색만으로도 완성되었다. ‘시간’이란 자원을 거의 쓰지 않고도, 생각의 결을 잃지 않은 글이 탄생하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물론 그 글이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다. 내가 다시 한번 숨을 불어넣고, 단어의 음색을 바꾸어주고, 문장 끝의 표정을 만져주면 비로소 ‘내 글’이 된다.
그 과정에서 오랜만에 어떤 기쁨이 찾아왔다.
AI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초안을 제시했을 때, 그 초안이 나의 리터칭을 거쳐 하나의 글로 완성되었을 때,
나는 아주 오랜만에 사소한 희열을 느꼈다.
누군가는 이런 글쓰기를 두고 기술에 의존한다며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글을 쓰는 ‘방식’이 변했을 뿐, 내가 표현하고 싶은 세계는 여전히 나에게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AI는 내가 미처 언어를 부릴 여력이 없을 때, 조용히 그 옆을 지켜주는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지금 나는 텅 빈 겨울로 물들어가는 산길을 천천히 걷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가늘게 쏟아지고, 바람은 차가운데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하다. 글쓰기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창작의 기쁨을 뜻밖의 방식으로 되찾아서일까.
AI와 함께 쓴 글을 진짜라고 부르든, 가짜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글이 다시 나를 숨 쉬게 만들고 있다는 것, 내 마음의 조각들이 다시 문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히 기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앞으로도 계속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