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찻물, 흐르는 시간—<일일시호일>에서 배우는 계절의 마음
무위의 찻물, 흐르는 시간—<일일시호일>에서 배우는 계절의 마음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사건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게 흘러가는 작품이다. 인물의 성취나 갈등보다, 다실 안에 비스듬히 스며드는 빛, 뜨거운 물이 부딪혀 내는 부드러운 소리, 찻잔 위에 잠시 머무는 김—이 소박한 세계가 인물의 마음을 천천히 변화시킨다. 그중에서도 마음 한가운데 오래 남는 문장이 있다.
“차는 계절을 마시는 거예요.”
이 말이 지나가는 순간, 영화는 시간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같은 잎을 써도 같은 맛은 난 적이 없었다는 스승의 말처럼, 차는 오늘의 물과 오늘의 공기, 그리고 오늘의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다실은 흐르는 시간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작은 철학의 방이다.
봄 — 불안의 속도를 따라가던 노리코
초반의 노리코는 미래만을 향해 몸을 세우는 사람이다. 정규직이라는 안정된 결과만이 중요하고, 현재의 시간은 모두 그 목적을 위한 ‘예비 단계’로 축소된다. 봄의 연둣빛 새싹처럼 아직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채, 빛을 향해 과하게 몸을 세우는 모습과 닮았다. 처음 다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손은 굳어 있었고, 동작은 시험 문제를 풀 듯 어색했다. 다도를 기술로, 인생을 정답이 정해진 절차로 이해하던 시기였다.
여름 — 억지 힘을 내려놓는 무위(無爲)의 감각
자가 말하듯, “억지로 하려는 자는 망치고, 붙들려 하는 자는 놓치게 된다.” 다도의 첫 가르침은 이 문장과 깊이 닿아 있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오는 순간 손목은 뻣뻣해지고 동작은 흐름을 잃는다. 여름날의 소나기를 재촉할 수 없듯, 다도는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세계다.
물이 끓고, 찻잎이 열리고, 찻잔이 식는 그 리듬에 몸을 맡길 때 비로소 차의 온기가 자연스레 흐른다. 스승의 “머리로 하지 말고 손이 하게 하라”는 말은 억지 힘을 내려놓고, 삶을 자연의 리듬에 맡기는 무위(無爲)의 태도를 생활 속에 불러오는 방식이었다.
가을 — 이해가 아닌 ‘체득’의 계절
시간이 흘러 다시 다실을 찾은 노리코는 스승 타키다의 부음을 듣는다. 가을의 짙은 고요 속에서 전해진 이 죽음은 ‘계절을 마시는 사람’이 된다는 말의 깊이를 보여준다. 화면 속 노리코의 몸짓은 이전과 달랐다. 더 잘하려는 긴장은 빠지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되었다.
스승을 잃었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몸에 스민 리듬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해가 아닌 체득의 지혜다. 오랜 시간 숙성된 가을의 열매처럼, 몸이 먼저 알고 마음이 뒤늦게 이해하는 가르침이었다.
겨울 — 사소한 온기가 남기는 오래된 위로
영화는 어떤 교훈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실에 들어오는 오후의 빛, 물이 끓어오를 때의 작은 소리,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그저 이 사소한 세계를 오래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소함’이 마음을 천천히 뎁혀 일상의 온도를 바꾼다. 노리코는 미래의 성취로 자신을 증명하려던 사람에서, 오늘의 속도와 감각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으로 변한다. 오늘이라는 차 한 잔을 온전히 마시는 일, 그것이 바로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 된다.
차 한 잔의 온기는 금세 식지만, 그 온도를 느끼는 마음은 겨울을 버텨내는 나무처럼 오래 남아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같은 날은 없다. 그렇기에 '오늘'은 단 한 번뿐이고, 매일 매일이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다.
메인 예고편: https://youtu.be/vA3zoqhB6lc?si=GVmctaj9EAHoL3W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