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쩔수가없다>와 고전"바틀비"가 묻는 생존의 조건

당신이 반복하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by 느리게걷는여자

영화〈어쩔수가없다〉와 소설 <필경사바틀비>가 묻는 생존의 조건-당신이 반복하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살인의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주인공이 다시 출근하는 장면—끝없이 돌아가는 기계들 사이에서 묵묵히 작업복을 입는 침묵의 공간—그 기계 소음이야말로 영화가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처럼 느껴진다. 실직 이전의 공장에는 사람의 온기, 동료의 숨결이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며 경쟁자를 하나씩 제거하고 재취업한 공장은 인간이 사라진 채 철제 팔과 컨베이어벨트만 남은 냉혹한 풍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은 자신이 지키려 했던 ‘가정’과 ‘집’을 위해 인간성을 하나씩 잃어버린 끝에 결국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업장의 일부가 된다.


능동적 거부 vs. 체념적 복종

여기서 떠오르는 존재가 있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소설속 바틀비는 필사본 검증부터 사소한 심부름까지 “I would prefer not to(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단호한 한 문장을 반복하며 세속적 질서에서 벗어난다. 그는 노동의 규율을 거부함으로써 체제에 균열을 내지만, 그 대가는 소멸이다.


반면 영화 속 만수는 체제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체제의 잔혹성을 내면화하고 폭력을 수행한다. 바틀비가 “거부함으로써 사라지는 사람”이라면, 만수는 “복종함으로써 사라지는 사람”이다. 둘은 정반대의 길을 걷지만, 결국 단 하나의 문장("어쩔 수가 없다" 혹은 "하지 않겠습니다")을 반복함으로써 세계에서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잃어간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만수의 “어쩔 수가 없다”는 스스로의 능동성을 포기하는 체념의 자기 암시다. 이 은밀한 언어는 구조적인 폭력에 동의하도록 만든다. 이 말 아래에서는 타인이 제거되는 것도, 자기 윤리가 붕괴되는 것도, 아내 미리의 침묵도 모두 정당화된다. 결국 만수는 살인 때문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다’는 말에 스스로를 맡겨 공장의 기계처럼 변해간다.


둘은 서로 대척점에 있지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노동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인간은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침묵을 선택하는가?”


메아리가 된 딸: 가족의 '언어 상실' 구조

영화는 이 비극적인 ‘목소리의 상실’을 딸 리원을 통해 가장 아프게 드러낸다.

딸 리원은 천재적인 첼로 연주 재능을 지녔지만, 그리스 신화의 메아리(Echo)처럼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반복하는 능력밖에 없다. 이 설정은 단순한 캐릭터 특성이 아니라, 이 가족 전체가 빠져 있는 침묵과 모방의 구조를 상징한다.


아버지 만수는 회사와 현실이 요구하는 말만 되풀이하며 “어쩔 수가 없다”를 삶의 언어로 삼는다. 어머니 미리는 남편의 범죄를 알고도 침묵하며, 가정의 평화와 경제라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체념의 언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딸 리원은 이 침묵과 체념의 언어를 가장 순수하게 반향한다. 말을 따라만 할 뿐, 스스로의 목소리는 없다.


첼로: 침묵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잔여

아이러니하게도, 딸 리원은 첼로 앞에서만큼은 자기 표현을 보여준다. 첼로는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까운 악기다. 말로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음악으로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불안, 사랑, 공포, 슬픔—을 표현한다. 이는 마치 가족 안에서 말로 표현되지 못한 모든 감정들을 딸이 음악으로 대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울림은 해방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아버지 만수가 일자리를 되찾고 가정이 겉으로나마 안락함을 회복한 후, 마치 전시품처럼 음악회 장면에서 등장한다. 아버지가 점점 체제의 기계가 되어가듯, 딸의 음악도 결국 이 가정의 침묵 구조 속에 갇혀 있다. 아이가 언어를 갖지 못한 이유는 단지 장애가 아니라, 이 집에서 누구도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체념, 어머니의 침묵, 사회의 무정함 속에서 딸은 메아리처럼 남의 말만 되풀이하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가 된다.


질문: 당신이 반복하는 말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결국 영화의 말미에 가족이 되찾은 평화는 침묵과 공모 위에 세워진 ‘가짜 평화’다.

가장 만수는 살인으로 일자리를 되찾았지만, 잃어버린 것은 인간의 얼굴이다. 어머니 미리는 진실을 묻어두었고, 딸 리원은 여전히 타인의 말만 반복한다. 기계만 가득한 공장은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간들의 종착점을 상징한다. 바틀비의 세계에서처럼, 말이 사라진 곳에는 삶이 아니라 단조로운 기계음만 남는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노동과 가족을 넘어,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바틀비가 “하지 않겠습니다”로 체제 바깥에서 죽음을 선택한 인물이라면, 만수는 “어쩔 수가 없다”를 반복하며 체제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낀 딸은 음악으로 간신히 인간의 잔여를 표현하지만, 그마저도 구조적 침묵 속에서 메아리가 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조용히 질문한다.

"당신이 지키려는 것은 정말 당신의 삶인가, 아니면 단지 삶의 형태인가?"

"당신이 지금 반복하는 말들은 진짜 당신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이름의 메아리일 뿐인가?"

그 질문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남긴 불편한 진실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몬스터콜>, 슬픔의 숲에서 발견한 두 갈래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