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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엘리스Still Alice>, 기억이 흐려질 때

내가 잃는 것은 ‘단어’가 아니라 ‘나의 세계’다.

by 느리게걷는여자

43세 워킹맘의 기억이 흐려질 때: 내가 잃는 것은 ‘단어’가 아니라 ‘나의 세계’다


1. 잃어버린 단어 하나, 무너지는 세계의 경계

요즘 나는 ‘언어의 배신’을 자주 경험한다. 아침 회의에서 필요한 전문 용어가 혀끝에서 맴돌고, 냉장고 앞에서 잠시 무엇을 찾으러 갔는지 멈칫한다. 40대에 접어든 워킹맘으로서, 매일 수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인출하며 살아야 하는 나는 이 사소한 ‘망각의 틈’이 생길 때마다 작은 균열을 느낀다. 마치 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언어의 세계에서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서늘함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Still Alice)>의 주인공 앨리스 하울랜드는 세계적인 언어학자다. 그녀의 세계는 질서정연한 단어들로 건축된 성채였지만,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은 그녀의 존재 이유와 세계의 구조를 뿌리부터 흔드는 재앙이었다. 이름을 잊고, 거리를 잃고, 문장을 더듬는 앨리스의 상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망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나의 세계 전체'를 파괴하는 과정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언어철학의 명제는 앨리스의 고통을 가장 잔인하게 요약한다.

“나의 세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이다.”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앨리스가 단어를 잃을 때마다, 그녀가 명료하게 이해하고 통제했던 세계의 경계는 지워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을 정의하던 교수, 연구자, 아내, 엄마라는 정체성은 언어라는 나침반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는 난파선처럼 표류한다. 알츠하이머는 잔인하게도 가장 '언어적인 인간'에게 '언어적인 형벌'을 내린 것이다.


2. 40대의 불안: 기억 과부하의 덫

43세 워킹맘인 나는 앨리스의 붕괴를 보며 남다른 이해와 공포를 느낀다. 나는 늘 ‘다중 역할의 마스터’가 되기를 강요받는 세대다. 회사에서는 놓쳐서는 안 될 수치와 업무 일정을 기억해야 하고, 집에서는 아이의 학습 스케줄과 부모님의 건강 체크리스트를 관리해야 한다. 내 머릿속 메모리는 과부하 상태의 서버와 같다. 자칫 망각에 의한 실수가 생겼을 때에는 ‘능력 부족’이나 ‘헌신 부족’이라는 자책감으로 이어지곤 한다.


앨리스처럼 완벽을 추구하던 사람에게 망각은 자기 통제의 실패를 의미한다. 나는 이 기억의 과부하 속에서 앨리스가 단어 하나를 찾지 못해 멈칫하는 장면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현대인의 불안을 상징하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기억이라는 끈을 억지로 붙들고서야 비로소 ‘정상적인 나’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병이 진행되자 과거의 자신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를 녹화한다. 그 영상 속에서 그녀는 현재의 자신을 다그친다. 그리고 문득, 우리는 그녀의 질문 앞에서 멈춘다. 기억은 억지로 붙잡는다고 더 명확해지는가? 어쩌면 인간의 불안은 잃어버린 기억 때문이 아니라, 기억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집착 때문에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3. 언어의 경계, 그 바깥에서 피어나는 관계

언어가 무너진 세계는 비극으로 끝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는 앨리스의 상실을 잔인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조명한다. 앨리스가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단어만 되풀이할 때, 남편과 아이들은 그녀의 눈빛과 손짓에서 의미를 읽어낸다.


언어라는 ‘설명 도구’가 사라지자, 그들이 발견한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앨리스의 붕괴는 가족들에게 통제와 설명이라는 견고한 장벽을 허물게 했고, 그들은 언어 없이도 이어질 수 있는 순수한 온기를 마주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대로 언어가 개인의 세계를 규정한다면, 언어가 멈춘 그 자리는 무(無)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앨리스의 마지막은 무가 아니었다. 막내딸 리디아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진 엄마의 옆에 앉아 책을 읽어주는 장면은,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는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던진다. 그 순간, 비트겐슈타인이 말하지 않은, 언어 바깥의 세계가 존재함을 깨닫는다. 그 세계는 기억을 함께 나누는 관계라는 공동체의 품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언어가 끊어져도 관계는 남는다. 설명할 수 없어도 사랑은 남는다.


4. 상실의 문턱에서 다시 쓰는 삶의 정의

영화 <스틸 앨리스>는 언어의 상실을 통해 인간의 가장 연약한 지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연약함이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근본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40대의 나는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잊어버릴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앨리스가 과거의 자신에게 남긴 그 문장은 상실의 문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집착을 내려놓았을 때 도달하는 가장 품위 있는 인간의 지혜처럼 울림이 전해졌다.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말 것. 순간을 살아갈 것.”

이것은 언어의 경계에서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이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가장 선명한 가치이다. 바쁘고 불안한 우리네 삶에도 가장 긴 울림으로 남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정한 평화가 어디에 있는지를 조용히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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