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의 얼굴, 사회에서의 얼굴

대학시절 가장 무서워했던 선배를 클라이언트로 만났다

by 재완

대한민국에는 3대 연이 있다. 혈연, 지연 학연. 아마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이라면 뼈저리게 느낄 말이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고, 사람의 능력을 먼저 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는 저 3가지 연이 침투해 있다. 그리고 그 3가지 연을 잘 달면 훨훨 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도 그 연 달아봤는데, 내 연은 ... 좀 이상했다.



너 진과장 후배라며?



인턴이 끝나고 정규직 사원이 되면서 처음 발령받은 팀의 팀장님이 내게 한 말이었다. 팀장님이 말하는 진과장은 나의 대학교 선배이자, 동아리 선배였고, 우리팀의 가장 큰 광고주의 마케팅팀 과장이었다. 워낙 오래되고 끈끈하기로 유명한 학교이자 동아리 출신이었기에 팀장님은 내가 은근히 그와 친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웠던 호랑이 선배. 호랑이 선배라니, 너무 유치한 표현이지만 그게 가장 걸맞는 선배였다. 그와 나는 사실 15학번이 차이가 나는 사이로 원래라면 학교에서 교수님이 아닌 이상 절대 볼 일이 없는 선후배 사이였다. 하지만 유독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 동아리는 15학번 선배는 커녕 40학번 차이나는 선배도 학교에 놀러오고, 종종 교육을 해주는 그런 동아리였다. 내가 진과장님과 처음 만난 건 1학년 여름방학 그가 교육을 하러 왔을 때였고, 나는 그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정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동아리실에 9시간동안 갇혀서 그가 내주는 과제를 달달달 외우고 선창을 하던 그 날을.



(굳이 나이가 나오는 것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지만) 지금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때도 분명 화는 나고, 부당하다는 것들은 알고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에게 어떻게 의견을 개진해야할 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한채 다 끝난 후에 잊어버리라며 술을 사주는 그 과정을 그저 당하기만 해야했다. 교육의 내용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원리 원칙에 대한 이야기였고, 다만 과정이 잘못되었을 뿐. 심지어 그 교육을 2년 연달아 받았던 나는 그 선배가 정말 너무 무서웠다. 그런 사람을 다시 사회에서 만나다니, 게다가 하필이면 맹수같은 광고주로. 정말 내 앞날은 끔찍할 것만 같았다.



“어, 너 재완이구나. 반갑다. ”



그런데 사회에서 만난 그는, 전혀 달랐다. 학교에서는 내가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얼굴과 미소, 그리고 멘트들. 특히나 그는 광고주임에도 불구하고 대행사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의견을 잘 들어주는 편이라 다들 좋아하는 광고주였다. 처음 광고주 미팅을 가서 그를 봤을 때, 내가 기억하는 항상 화나고 분노한 얼굴과 달리 인자하게 웃어주는 얼굴에 얼마나 당황을 했던지. 내가 아는 사람이 맞는 지, 집에 가서 동우주소록을 뒤져서 직장과 전화번호를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


저렇게 잘 웃고 친절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우리한테는 왜?! 처음 그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회사에서의 모습은 사회생활을 하는 가면이었던 거다. 나 역시도 학교에서의 모습과 회사에서의 모습은 전혀 다르고, 술자리에서 회사 전화를 받을 때면 친구들이 목소리 달라진다며 얼마나 놀리는가.


실제로 그는 나와 둘이서만 이야기할 때나, 따로 일을 줄 때는 종종 학교에서의 모습이 나오곤 했다.


재완, 이 정도는 돈 안받고 해줄 수 있지?


홈페이지에 실리는 모델과 제품 합성 일이었는데, 나에게만 따로 메일로 준 후, 이정도 일은 별 거 아니니 광고 비용을 받지 말라는 말을 그가 했다. 사원 초년차였던 나는 너무 당황한 채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어버버 거렸고, 그는 ‘그런 줄 알겠다’ 라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 사수는 옆에서 그 내용을 다 들었지만, 일부러 내가 해결 할 수 있도록 (귀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못들은 척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정말 전화기를 들고 끙끙 앓으며 어떻게 말을 할까, 어떻게 전화를 할까 반나절 정도를 고민했다. 그리고 합성 시안을 보내며 겨우겨우 선배에게 전화하며 말을 꺼냈다.



조금이라도 주셔야해요 ... 제발...



진짜. 저 제발이란 말은 하지 말 걸. 지금 생각하니 너무 치욕스럽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고, 당당하게 반문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내가 빌면 될 줄 알았다. 더 슬픈 건 그렇게 빌었더니 그가 정말로 비용처리를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 그는 나에게 따로 이상한 일을 시키거나 한 적도 거의 없었고, 다른 광고주들에 비해 친절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내 안에 꽤 오랫동안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달기만 하면 앞으로 훨훨 날아갈 줄 알았던 학연은 오히려 나를 옭아맸고, 태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 학연은 이제 지긋지긋하고, 지연, 혈연은 뻔하다. 난 역시 그냥 나만 믿고 가야하는 팔자인가보다.

keyword
이전 04화그래, 아버님은 잘 지내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