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하우스 오브 기네스' 속 진실 밝히기
스마트 폰이 등장하기 전, 한가위 연휴는 특선 영화를 보는 시간이었다. TV는 상영관에서 막 사라진 영화들로 명절에 지친 사람들을 유혹하곤 했다. 유난히 길었던 이번 연휴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점은 예전과 달리 채널이 아니라 스마트 폰 작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는 것. 그러고 보면, TV는 점점 더 커지는데, 우리 눈이 작은 화면에 익숙해지는 게 신기할 뿐이다.
올해 한가위는 지하철을 오가다 짬짬이 넷플릭스를 보는 나에게 간만에 시간을 선물했다. 대한민국 탑10 영화와 드라마는 작은 화면 속에서 자신을 선택하라며 아우성이었다. 코믹, 멜로, 액션, 스릴러까지 무엇을 볼까 고민하던 중, 익숙한 제목과 로고가 하나 눈에 띄였다. ‘하우스 오브 기네스’(House of Guinness). 우리가 알고 있는 맥주, 그 기네스였다.
기네스 드라마가 나오다니, 눈이 반짝였다. 미리보기에서 보이는 맥아와 홉, 증기를 뿜는 양조장비와 맥주 통 그리고 검정색 기네스는 이미 나의 마음을 빼았고 있었다. 할 수 없지. 이렇게 된 김에 기네스 가문의 거대한 비밀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기네스 스타우트는 맥주 역사 상 가장 성공한 흑맥주다. 고혹적인 흑색, 아이보리 빛 거품, 부드러운 목 넘김은 250년 넘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누군가는 ‘고작 맥주에 무슨 드라마가 있겠어’라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기네스는 19세기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맥주다. 로고 안으로 아일랜드 상징, 하프가 들어가기까지 화려하지만 피 비린내 나는 역사가 숨어있다.
‘하우스 오브 기네스’는 19세기 아일랜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강의 노벨 문학상 작품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광주민주화항쟁을 알아야 하듯, 기네스 이야기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했던 그 당시 아일랜드와 운명적으로 친영기업일 수밖에 없었던 기네스 가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경계인 맥주, 기네스에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나에게 ‘하우스 오브 기네스’는 매 장면이 흥미롭고 공부가 됐다. 이 드라마는 대단한 반전이나 결론보다 아일랜드와 기네스 간 아이러니한 서사와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 줄기를 이룬다. 하지만 우연히 이 드라마를 선택한 사람은 시대적 허구와 과장이 드라마 전체에 깔려있어 자칫 역사를 크게 오해할 수 있다. 지금부터 흔히 볼 수 없는 맥주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한 기네스 역사, 그 진실 혹은 거짓을 풀어본다. 기네스 한 잔을 옆에 두고 보면 더 좋을 듯.
5세기부터 가톨릭 국가였던 아일랜드는 12세기말부터 영국의 치하에 있었다. 본격적인 식민 통치가 시작된 시기는 16세기부터다. 그전까지 두 나라 사이는 비교적 평온했다. 하지만 영국 왕 헨리 8세가 성공회를 세우며 가톨릭과 결별했고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본격적으로 가톨릭을 억압하며 두 민족 사이에는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다.
아일랜드인들은 끊임없이 독립을 위한 봉기와 투쟁을 벌였지만,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아일랜드 탄압은 더욱 깊어졌다. 영국이 시행한 ‘가톨릭 억압법(Penal Laws)’은 가톨릭 신자에게 투표권과 토지 소유권을 금지했고, 성직자 양성조차 막았다. 곡물은 수탈됐고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감자와 보리 찌꺼기로 연명했다.
기네스 창립자 아서 기네스는 이런 시대에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그의 아버지 리처드 기네스는 아서 프라이스라는 부유한 성공회 목사의 집사였다. 아서라는 이름도 대부였던 목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서 기네스는 상대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았으나 개신교라는 운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네스가 양조사의 길로 들어선 이유에는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아버지가 아서 프라이스 목사의 맥주를 관리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과 외할아버지가 레익슬립에서 맥주를 양조하는 여관을 운영했기에 자연스럽게 양조를 받아들였다는 설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맥주의 향에 빠져든 그에게 양조업은 운명과 다름없었다.
1755년 아서 기네스는 레익슬릭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양조장을 시작했다. 아서 프라이스 신부가 유산으로 남긴 100파운드(지금 돈으로 3000만 원 정도)가 자본금이 되었다. 4년 간 양조사로서 기반을 다진 아서 기네스는 사업을 확장하려면 더블린으로 가야한다고 확신 했다. 더블린은 영국 식민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다. 사실 땅만 아일랜드일 뿐, 또 다른 영국 도시였다. 아일랜드의 모든 자본은 그곳에서 돌고 있었다.
더블린은 아서 기네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이미 사업을 벌이고 있는 몇몇 사촌들 덕분에 사업적 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라는 종교적 배경이 있어 활동에 장벽이 없었다.
새로운 양조장을 물색하던 그에게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사업을 접은 지 오래된 황폐하고 낡은 양조장이었다. 하지만 큰 자본이 없었던 아서 기네스는 강물이 가까이 있고 임대료가 낮은 그곳을 성공의 발판으로 점찍었다. 그리고 1759년 맥주 역사 상 다시는 볼 수 없는 9000년 간 45파운드에 임대 계약을 하게 된다.
지금 기네스 스타우트의 전신인 검정색 맥주, 포터는 1770년 후반에 출시했다. 아서가 에일 양조를 포기하고 포터를 선택한 배경에는 영국의 불공정한 관세 정책이 있었다. 영국은 자국에서 수입하는 포터 맥주에 세금을 거의 부과하지 않아, 역차별을 만들었다. 아일랜드의 소규모 양조장은 붕괴되었고, 아서 기네스는 이런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포터 생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자충수가 뜻밖의 선물이 되어서 돌아왔다. 더블린의 경수는 포터를 만들기에 적합했을 뿐만 아니라 경쟁업체들이 줄어든 까닭에 시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제국이 식민지를 수탈하며 만든 산업 구조 속에서 기네스는 성장했다.
기네스 양조장은 아들 아서 기네스 2세 시절에 이르러 거대한 성장을 이룩했다. 흐릿한 개신교도였던 아버지와 달리 기네스 2세는 철저한 보수 개신교도였고 영국과 아일랜드가 하나여야 한다는 연합주의자였다.
다니엘 오코넬이 이끄는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인해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가톨릭 신부가 이끄는 금주운동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지만, 기네스 2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기네스 포터를 증류주보다 온건하고 절제를 갖춘 맥주로 선전하며 대중에게 다가갔다,
더 나아가 기네스 포터를 영국 시장에 정착시키며 본토 맥주들을 압도했고 생산 시스템을 개선해 비용을 낮추었다. 기네스 2세가 이끄는 사업은 고공비행을 멈출 줄 몰랐다.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져 어느덧 더블린을 대표하는 거물로 성장했다.
그 단면을 보여주는 예가 1821년 조지 4세가 더블린에 방문했을 때다. 1820년 아일랜드 은행 총제가 된 기네스 2세는 더블린 대표로 직접 왕을 의전하고 보위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 왕을 지근에서 직접 보필한 몇 안 되는 인물이자 계급 이동의 신화를 이룬 인물이 된 것이다.
이런 정치적 행보를 보인 기네스 2세였지만, 정치적 종교적 발언을 자제하며 사업가로서 본분을 잊지 않았다. 또한 엄청난 부를 소유한 자본가였지만 착취 행위를 하지 않고 당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직원 복지 정책과 자선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여러 병원을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병상을 지원했으며 빈곤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꾸준히 기부했다. 더블린 빈민 구호 기관을 통해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아일랜드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 기네스 2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자본으로 사회를 치유하려 한 사회적 기업가이자 개혁가였다.
하지만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대기근 시절에 기네스의 행적에는 찜찜한 구석도 있다. 내가 기네스에 품고 있는 근원적인 의구심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1845년부터 1852년까지 7년 간 진행된 인류사적 참사였다.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텃밭에서 키운 감자로 하루를 연명했다. 그런데 1845년 여름 감자 역병이 돌기 시작해 주식으로 먹던 감자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굶어 죽어나갔지만 영국의 대응은 느리고 안일했다. 더 비참한 사실은 감자를 제외한 나머지 곡물들은 풍년이었다는 것이다. 100만 명의 사람이 아사했고 100만 명의 사람이 나라를 떠났다.
더블린에 살던 사람들은 처음에 단순히 서쪽과 남쪽 농민 문제로만 인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더블린 구호 위원회를 설립해 구호에 나섰다. 가장 적극적이고 체계적이었던 곳은 퀘이커교 단체였다. 아서 기네스 2세도 더블린 구호 위원회에 자금을 기부했다. 문제는 이들의 지원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대다수 지주들은 문제를 외면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당시 기네스 2세는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 벤자민 리에게 실권을 물려준 상태였다. 자료를 보면 기네스 2세가 대기근에 기부를 하긴 했지만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 경영자로서 한계를 벗어나길 꺼려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지갑을 열려있다’라는 말을 전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더구나 친영주의자였기에 사태를 방관하는 영국을 비판하거나 거슬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여기에 연합주의 자본가로서 한계가 보인다.
공짜 식량지원은 개신교 원칙에 어긋난다는 생각도 했다. 자금은 지원했지만 적극적인 구호활동은 진행하지 않았다. 이는 벤자민 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 대기근이 지난 후, 기네스는 낮아진 토지와 인건비로 더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대기근은 의도치는 않았지만 결국 기네스 사업에 유리한 결과가 되었다.
대기근의 참혹하고 비참한 경험은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의 정체성에 남아있다. 이후 영국을 향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영국이 도왔다면 수백 만 명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 테니까. 1858년 아일랜드와 뉴욕에 결성된 무장 투쟁 조직 페니언(Fenians)는 독립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실행하며 1867년 무장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기네스는 아일랜드인이나 페니언의 타도 대상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분명이 기네스에 대한 폭동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실제 기네스는 공격대상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기네스가 친영 개신교 기업이긴 했지만, 엄청난 아일랜드인들을 고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네스 직원들은 높은 임금, 의료 보장, 은퇴 연금을 받았다. 그렇다고 개종을 하거나 친영을 요구 받지도 않았다.
또한 아서 기네스 1세부터 기네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자선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었다. 아서 기네스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자선 사업을 시행했다. 이들은 부유했지만 검소, 절제, 친절 같은 가치를 유지해 아일랜드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페니언조차 기네스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의 타깃은 영국 자체였지, 아일랜드 기업이 아니었다. 자칫 기네스를 공격하면 민심을 잃을 우려도 있었다. 기네스의 자본이 아일랜드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페니언이 기네스에 친화적이었다는 건 아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벤자민 리 기네스가 가문을 이어받으며 양조장은 세계로 확장됐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였고, 더블린의 대표적 자선가였다. 가장 큰 업적은 세인트 피터스 성당의 완전한 복구였다. 개신교도였지만 가톨릭에 대한 차별 없이 그는 아일랜드의 오랜 숙원이었던 세인트 피터스 성당 복원에 큰 기여를 했다.
기네스 가문의 정계 진출도 벤자민 리에서 나왔다. 1865년 그는 보수당 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물론 양조장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런 기네스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은 언제나 양가적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기네스는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끼어있는 경계인 맥주였다.
넷플릭스의 <하우스 오브 기네스>는 바로 1868년 벤자민 리 사후를 무대로 한다. 첫 장면부터 자극적이다. 기네스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페니언들이 벤자민 리의 장례식을 방해할 계획을 세운다. 사람들은 관을 향해 돌을 던지고 야유를 한다. 만약 기네스 가문을 모른다면, 벤자민 리를 착취자이자 민족반역자로 오해할만한 장면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 벤자민 리의 장례식은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엄숙하게 치러졌다. 추가적으로 페니언에 의해서 항구에 있던 기네스 맥주 배럴이 폭파되는 장면도 허구다. 페니언은 기네스를 무력으로 공격한 적이 없다.
드라마에는 벤자민 리의 네 명의 자식이 등장한다. 아서, 앤, 셋째 벤자민, 에드워드, 이들이 하우스 오브 기네스의 주인공이다. 네 명의 캐릭터는 극적이다. 첫째 아서는 사업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방탕한 ‘동성애자’다. 둘째 앤은 참을성이 많고 침착하지만 병약하며 셋째 벤자민은 알코올 중독자다. 넷째 에드워드는 기네스 사업 확장에 몰두하는 일중독자로 나온다. 드라마는 가족 간의 갈등, 신앙과 욕망, 독립운동 세력과의 충돌이 이어지며, 이야기의 중심에는 항상 ‘기네스’라는 이름이 놓인다. 그러나 이 인물 설정도 허구가 존재한다.
첫째 아서는 동성연애자가 아니었다. 자식은 없었지만 올리비아와 결혼해 평생 아름다운 부부로 살았다. 극중에서는 자유롭고 방탕한 이미지로 나오지만 실제 성격은 반대였다고 한다. 동성연애자 설정은 그가 중혼 의심을 받았던 사실에서 가져온 듯하다. 물론 소송과 재판을 통해 무혐의를 증명했다.
장남으로 기네스를 상속받았지만 사업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아 정계에 진출했다. 드라마에서 선거운동에서 현금봉투를 건네 의원직 박탈을 당하는 건 사실이다.
둘째 앤은 실제 병약했다. 활발한 자선사업을 펼쳤으며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드라마에서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사실이 아니다. 셋째 벤자민 또한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군복무를 한다고 나오는데 사실이며 사업에 관여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넷째 아서와 함께 가업을 승계 받은 에드워드는 아버지처럼 기네스를 꾸준히 성장시켜 나중에 상장까지 시킨 똑똑하고 날카로운 사업가였다. 그는 15살 때부터 양조장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아버지와 가장 많은 유대를 가졌다. 벤자민 리는 정치에 관심 있는 아서가 아니라 에드워드를 후계자로 점찍어 양조장 지분의 반을 주었다.
참고로 양조장 관리인이자 해결사로 나오는 숀 레퍼티라는 인물은 허구다. 하지만 레퍼티 역할에 참고가 된 인물은 존재한다. 존 퍼서 아들이다. 존 퍼서는 1820년 기네스 2세부터 대대로 양조장을 관리한 가문이다. 실제 벤자민 리 사후 존 퍼서의 아들은 에드워드의 사업 멘토로 활동으며 에드워드도 많이 따랐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인 허구는 기네스가 페니언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정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페니언과 연예를 했다는 설정도, 뉴욕 수출을 위해 페이언을 이용했다는 것도 드라마적 허구다. 뉴욕과 아일랜드 페니언들이 함께 자금을 모집하고 무장 봉기를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배후에 기네스는 없었다.
기네스 가문의 역사는 기네스처럼 쌉싸름하다. 1862년 기네스는 하프 문양과 게일어 라벨을 도입하며 자신의 맥주를 ‘아일랜드의 맥주’로 변신시켰다. 식민의 상징이 해방의 상징으로 바뀌는 아이러니. 자본은 해방의 언어를 흡수했고, 사람들은 그 모순 속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기네스가 가진 힘이다. 검은 맥주, 흰 거품. 그 안에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공존한다.
하우스 오브 기네스는 역사적으로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진실하다. 허구와 과장 속에서 기네스라는 이름이 품은 복잡한 윤리, 신앙, 그리고 자부심이 드러난다. 기네스는 늘 경계에 있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식민과 독립, 신앙과 자본의 경계. 그 복잡한 경계의 맛이야말로, 우리가 지금도 잔을 기울이며 느끼는 쌉싸름함일 것이다.
그래서 맥주는 맥락의 음료다. 역사를 알고 마시면 맛이 깊어진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도 괜찮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이야기니까. 마지막으로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자. Sláinte! (슬란체,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