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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멈춰진 것에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by 진영

정물




내가 사는 원룸에는 낡은 노란색 장판이 깔려있다.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 이 장판은 세월의 흐름까지 정통으로 맞아 여기저기 들뜨고 갈라진 상태였다. 우스운 것은 건물주가 그 갈라짐을 해결하고자 진한 갈색 테이프로 틈을 메꿨다는 거다. 그래서 방에 들어오면 선명한 테이프 자국이 가장 먼저 눈 들어왔다.


테이프 자국은 마치 남과 북을 나누는 38도선 같기도 했고, 달리기 시합을 위해 그어둔 출발선 같기도 했다. 뭐가 되었든 그건 평화와 안정의 상징은 아니었다. 계절 중에 봄, 여름은 그나마 나았다. 가을, 겨울이 되면 뜨끈한 보일러 때문에 테이프가 끈적해졌다. 그때 물티슈로 닦아내거나, 커터 칼로 긁어내지 않으면 옷이나 이불에 달라붙어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책상에 앉으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분명 한 일은 있는데, 손은 매번 빈손이었다. 나의 노동이 돈이 되지 않던 때였다. 가끔 이런 상황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노란 장판에 냅다 드러누웠다. 책상 앞은 현실이고, 장판 위는 도피처였다. 사실 도피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둘 다 불편한 건 여전하니까. 책상에 앉으면 몸이 불편하고, 장판에 누우면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떤 불편함을 선택할까? 정도였다.


장판 위에 누우면 차갑고 딱딱했다. 내 몸에 있는 모난 부위가 완충 하나 없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작은 고통이 생겼다. 그래서 하늘색 여름 이불을 그 위에 하나 깔았다. 창문 밖에서는 햇볕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살아있는 소리였다. 마땅히 움직여야 할 시간에 나만 홀로 멈춘 상태였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이불을 온몸에 돌돌 말았다. 마치 애벌레가 된 것처럼.



어린 시절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다. 플라타너스는 우리에게 놀이터이자, 계절의 지표였다. 여름이 오면 가장 먼저 그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그때 나는 플라타너스에서 매미의 허물을 처음 봤다. 친구들은 허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매미의 허물을 보며 가짜라고 말했다. 허물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살아있는 매미를 찾는 동안 혼자 남아 알맹이가 빠진 빈 껍데기를 한참 동안 살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매미는 성충인 시기의 모습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성충인 매미의 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도 알았다. 매미의 생애 중 대부분은 땅속에서 생활하는 유충인 상태였고, 이후 여러 번의 탈피를 통해 성체인 매미가 되는 거였다. 플라타너스에 붙은 허물은 가짜가 아니었다. 매미가 성장해 가는 시간의 흔적이었다.


몸을 돌려 창밖을 보니 칠흑 같은 어둠이 껴있었다. 나는 온몸을 감싼 이불속을 빠져나왔다. 마치 유충이 허물을 벗는 듯한 모습으로. 시계를 올려다보니 생각보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오늘 밤은 산책보다는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방 한가운데 그어진 짙은 갈색 테이프를 지나 문밖을 나섰다. 달리기 시합에서 이제 막 출발선을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집 근처 공원을 뛰는 동안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공원을 둘러싼 커다란 나무에서는 매미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넘실댔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매미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헐떡이는 숨을 멈추고 형체 없는 소리를 바라봤다. “멈춰진 것에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멈춰진 것에 기대어 살고 있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숙여 신발 끈을 다시 한번 동여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전력을 다해 어두운 밤을 뛰었다.




'정물'. created by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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