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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스

우리는 중심에 가닿을 수 있을까?

by 진영

컴퍼스




밤이 되면 한 평정도 되는 좁은 방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목적지를 따로 정하진 않았다. 걷다가, 멈추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주저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러면 짧게는 한 시간 길면 세 시간이 걸렸다. 산책은 오래된 나의 유희였고, 서울살이 2년째 서울의 가장 큰 장점은 산책길이 지루하지 않다는 거였다.

달이 없는 그믐에는 붉고 푸른 네온사인을 따라 걸었다. 아직 서울길이 익숙하지 않아 걷다 보면 외딴곳이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나 정류장을 찾아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걷다가 허름한 문방구에 들어갔다. 무언가를 사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반가운 향수를 느껴서였다. 문방구 한 편에는 붉은색 돼지 저금통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나무로 만든 진열대 안에는 사탕과 군것질거리가 잔뜩 들어있었다. 나무 진열대는 짙은 갈색이 벗겨져 흰 살갗이 보였는데, 생채기 가득한 그 모습에 세월이 느껴졌다.


문방구를 나오며 ‘컴퍼스’를 하나 샀다. 한때는 유용했으나, 이제는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구매한 이유는 이것저것 구경하고 빈손으로 나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였다. 이런 경우에는 작은 거라도 하나 사지 않으면, 마치 뭐라도 훔쳐 나가는 사람처럼 죄의식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적당한 가격과 적당한 쓸모를 가진 물건을 찾다 보니 엉겁결에 손에 잡힌 게 은색 컴퍼스였다.


자정이 조금 지나 방에 도착했다. 스탠드 조명을 켜고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컴퍼스를 샀으니, 작은 ‘원’이라도 그려볼 셈이었다. 컴퍼스에 연필을 끼우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부분을 원의 중심이 될 곳에 콕~하고 찍었다. 그런 다음 엄지와 검지로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원을 그렸다. 원 하나, 원 둘, 원 셋. 원 넷.


컴퍼스로 그린 원의 모습은 보드라운 형태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컴퍼스에 묶인 연필은 원의 중심과 만날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그 공전하는 운명에 애잔함을 느꼈다. 동그란 원 하나에 이런 감정을 느낀 이유는 최선을 다해도 닿지 않던 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움직여도 둥글게 돌기만 할 뿐 직선이 되지 못한 나날이었다.


더는 그릴 공간이 없을 때까지 한참 동안 원을 그렸다. 그러고 나서 그려진 원 위에 새로운 원을 겹쳐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일 때는 닿지 못했던 원의 중심을 다른 원이 통과해 지나갔다. 지나온 흔적이 어느 순간에는 중심이 되는 거였다. 나는 컴퍼스로 만든 문양을 보며 생각했다. 컴퍼스에 묶인 연필도 중심에 닿을 수 있다고.




'컴퍼스'. created by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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