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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기억의 미로 속에서 인간을 묻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강렬하고 매혹적인 작품이다. 겉으로는 연쇄살인이라는 자극적 소재를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기억의 불확실성과 인간 정체성의 취약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놓여 있다. 기억이 사라진 ‘나’는 여전히 ‘나’ 일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돈 질문이다.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인칭 화자의 독백이다. 독자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서사에 몰입하지만, 곧 불안에 휩싸인다. 왜냐하면 화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 그것도 과거에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은 왜곡될 수밖에 없고, 독자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망상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진실과 허구, 현재와 과거가 교직된 균열의 기록 앞에서 독자는 혼란을 겪는다.


소설은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살인자의 기억은 단순히 범죄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 자체를 비추는 은유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파편화된 회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삭제하는가? 소설은 이 질문을 통해 자아란 결국 선택과 왜곡 위에 세워진 불안정한 건축물임을 보여준다.


특히 화자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설정은 그의 기억이 ‘진실’이 아니라 ‘창작물’ 임을 강조한다. 사실과 환상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그의 서술은 독자를 미로처럼 헤매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주인공 김병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기억은 본래 조각난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편집되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조차 덧붙인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사람마다 기억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기억은 단순한 과거 기록의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적 토대이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근거다. 따라서 기억의 불확실성은 곧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이 소설은 또한 범죄자라는 극단적 인물을 통해 윤리적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김병수는 살인자라는 과거를 지녔지만, 기억이 사라져 가는 현재에는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로 남고자 한다. 그는 살인자이면서 보호자이고, 죄인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기 위해 애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독자는 그를 단순히 ‘악의 화신’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기억이 소멸하는 와중에도 딸을 지키려는 그의 모습은,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한 모순과 복잡성을 상징한다.


결국 이 작품은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기억이라는 불완전한 장치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와, 우리가 믿어온 정체성이 얼마나 취약하고 가변적인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스릴러의 외피 속에서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가의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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