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하나로 축약된 인생이란 얼마나 야박한가. 숫자라는 기표가 한 사람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번호, 360515-1690812. 이 땅을 살다 간 한 사람의 존재 증명, 아버지의 주민번호다. 숫자열은 단정하다. 줄을 잘 맞춘 기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밥벌이를 위한 고된 노동의 시간, 잠 못 이루던 밤, 자식을 향한 애절한 눈빛이 숨어 있다. 서툰 농담과 축 처진 어깨, 손바닥에 새겨진 굳은살까지도. 육체의 소실과 함께 사라져 버린 번호, 그 공식적인 표식 앞에서 나는 암담해진다.
인간은 어리석다. 눈앞에 있을 때는 보지 못하고, 소리 내어 부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통하게 그 이름을 되뇐다. 이제 와서 아무리 힘껏 아버지를 소환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켜켜이 쌓인 후회와 그리움, 되돌릴 수 없는 과거는 깊은 회한의 강이 되어 내 안에서 흐른다.
아버지를 보내 드린 후, 내 안에는 구멍이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실금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틈은 점점 더 넓고 깊어졌다. 허무와 절망과 그리움이 번갈아 들어앉아 그 빈자리를 잎새처럼 흔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멍은 더 깊어졌고, 어느 날 문득 나는 그 빈틈이 내 삶 전체를 삼켜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무엇으로 그 공동을 메워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날들이 길게 이어졌다.
"한 사람이라도 그를 기억한다면 그는 영원히 사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글쓰기 외에는 변변한 재주가 없는 딸이 할 수 있는 일은 펜을 들고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말없이 살아간 한 사람의 일상과 고단함, 부서진 밤과 소소한 기쁨을 글로 붙잡아 두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소박한 애도였다.
누군가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소중한 흔적들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종국에는 우주의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소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아버지의 삶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거나 사회에 거대한 기여를 해서가 아니다. 엄혹한 시대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세 아이를 키워내고 한 가정을 책임진 그의 삶 역시 가치 없다고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이 글을 써야만 했다. 우리 대부분의 인생 역시 아버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더더욱 그렇다.
가난한 시대를 온몸으로 지나왔고, 조건 없는 책임과 희생의 자리에서 평생을 버텨냈다. 종손이라는 이름 아래 간신히 대학에 들어섰고, 직장을 얻어 가정을 꾸렸고, 세 아이를 먹여 살렸다. 가끔은 경제적인 문제로 아내와 다투었고, ‘돈을 못 버는 가장’이라는 자책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은퇴 후 찾아온 여유는 길지 않았고, 늙음과 함께 찾아온 기억의 손실은 아버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요양원에 계셨던,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들. 그리고 병실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떠올릴 때면 정신이 멍해진다. 수없이 합리화를 시도해도, 죄책감의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너무 외롭게 보내 드렸다. 평생을 묵묵히 혼자 싸우며 사셨고, 마지막 순간까지 쓸쓸히 홀로 떠나셨다. 그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외로움을 어리석은 딸은 뒤늦게 헤아린다. 그래서 나는 기록이라도 해야 했다. 알지 못했던 젊은 아버지의 고뇌와 삶의 무게, 굽은 어깨에 얹혔던 외로움과 쓸쓸함을 상상하려 애썼다. 기록은 과거를 되돌릴 수 없지만, 바람처럼 사라질 뻔했던 그의 흔적을 불러내어 삶의 무늬로 엮어낼 수 있음을 믿었다. 젊은 날의 표정, 숨죽인 고뇌, 그리고 노년에 남긴 외로움과 작은 웃음까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생을 한 줄씩 보듬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예의였다.
이제 숫자는 더 이상 관청의 장부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내 글 속에서 숨을 쉰다. 주민번호는 개인을 식별하는 기계적 표지일 뿐이지만,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들은 그 표지에 따뜻한 온도를 덧입힐 것이다. 하루하루를 부딪치며 살아낸 사람의 무수한 순간들이 모여 한 생이 되고, 나는 그 조각들을 모아 그의 얼굴을 복원하려 한다. 숫자는 사라질 수 있어도, 내가 붙잡은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이것이 내 방식의 존재 증명이다. 법정 서류가 남긴 기계적 표식 아래에서도 당신의 삶은 내 문장 속에 살아 있다. 간절한 바람이 글이 되고, 서사가 되어 아버지의 빛바랜 삶이 선명히 기억되길 바라며. 이 글을 아버지의 영전에 바친다. 늦었지만, 끝내 지울 수 없는 그리움으로 당신을 다시 호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