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에 대한 스웨덴 한림원의 찬사,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은 문학의 본질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는 기사 한 줄이나 판결문 몇 문장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진실의 복합적인 결을, 문학이 어떻게 끌어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평가다. 한강의 작품 세계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일상 언어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 언어의 한계와 싸우며 고통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치열한 시도 그 자체다. 고통스러운 여정을 지나고, 균열과 공백,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끌어안아야 가능한 일이다.
문학은 세계를 재현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하지만, 언제나 '완전한 재현'에는 실패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이런 재현의 불완전성과 한계 사이의 긴장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속 13살 소녀 브라이오니의 오해와 넘치는 상상력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녀의 성급한 증언은 두 연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법정의 언어는 브리오니의 목소리를 명료한 '증거'와 '사실'로 규정하지만, 바로 그 순간 진실은 왜곡된다. 명확한 판결문 앞에서 복잡한 진실은 힘을 잃고 불확실성과 모호함, 인간 경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법정 언어의 문턱에서 잘려나가고 만다. 뼈대만 남은 허술한 문장은 그 어떤 진실의 무게도 담아내지 못한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 즉 공식적 기록이 포착하지 못하는 공백과 침묵의 틈을 파고든다. 법과 언론의 언어가 잘라낸 인간 경험의 복잡한 진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죽은 자의 목소리, 끝나지 않은 애도의 감각을 되살리려 한다.
결국 소설가의 일이란 '증거'와 '진술' 사이에서 미끄러져 사라지는 진실의 그림자를 붙잡는 것이다. 한강이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의 목소리를 불러내듯, 매큐언은 『속죄』를 통해 한 개인의 삶을 관통하는 진실의 파편들을 좇는다.
『속죄』의 후반부에서 노년의 브리오니가 다시 쓰는 소설은, ‘법적 진실’이 파괴했던 ‘인간적 진실’을 붙잡으려는 시도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인정하듯, 그것은 끝내 불가능하다. 문학은 파괴된 삶을 온전하게 되돌릴 수 없으며, 그녀의 언어는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브라이오니의 글쓰기는 실패를 떠안은 채 책임을 다하려는 속죄의 과정이다. 그녀의 문학은 ‘완전한 진실 재현’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은 '속죄의 불가능성'을 증언하는 가장 정직한 장치가 된다.
이처럼 문학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그대로 독자 앞에 펼쳐 놓는다. 진실을 "완전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끝내 다 말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다른 어떤 언어도 닿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가장 깊은 차원을 증언한다.
문학의 힘은 바로 이 불가능성을 끌어안는 데서 발현된다. 진실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자체가 문학이 보여주는 가장 치열한 진실인 것이다. 『속죄』는 불완전한 이 길을 끝내 걸어가려는 한 인간의 평생에 걸친 고백이다. 언어가 가진 한계와 문학적 재현을 통해서 평생을 속죄하는 한 인간의 윤리적 고뇌를 다루고 있다. 불가능성 속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브라이오니의 모습을 통해, 실패를 끌어안고 나아가는 윤리적 태도가 무엇인지 촘촘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