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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상상하는 일

- 그 시절의 당신에게 말을 걸다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어린 시절의 어느 날, 빛바랜 흑백 앨범 속에서 나는 낯선 청년을 발견했다. 살이 없는 날렵한 턱선, 형형한 눈동자,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의 그는 카메라를 보며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아직 세상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듯한, 뭔가를 꿈꾸는 듯한 표정의 청년은 젊은 날의 아버지였다. 어린 마음에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식에게 부모는 언제나 '부모'일뿐, 그들에게도 빛나는 청춘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린아이의 상상력 너머의 일이었다.


뒤늦게 아버지의 시간을 상상해 본다.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떼를 쓰던 어린아이의 모습, 고모들의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던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웃음을. 책가방을 메고 흙먼지 날리는 길을 걸어 학교로 향하던 아침의 냄새를. 여드름 가득한 사춘기 소년이 되어 여학생의 뒤를 소심하게 따라가던 그 시절의 설렘을.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열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젊은 교사의 눈빛, 마침내 엄마를 만나 사랑을 배우고 한 사람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가던 시간을 천천히 그려본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러나 분명 존재했을 아름답고 평범한 삶의 서사 속에서 아버지는 한 사람의 소년이자 청년으로, 그리고 한 가정을 이끄는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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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썬>은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 아버지 캘럼과 딸 소피의 며칠을 담고 있다. 화질이 고르지 않은 캠코더 영상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행복하게만 보이는 부녀의 휴가를 비춘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부모의 이혼으로 스코틀랜드와 런던에 떨어져 살고 있으며, 아빠 캘럼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다. 홀로 밤바다를 향해 걸어가거나 등을 보인 채 오열하는 모습은 그의 위태로운 내면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이 캠코더에 담긴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이제 아버지의 나이가 된 소피의 상상이자 기억의 재구성이기 때문이다.


열한 살 소피는 아빠의 춤을 보고 웃었지만, 어른이 된 소피는 웃을 수 없다. 아빠가 그때 너무 힘들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소피는 과거의 파편을 모으지만, 낡은 필름을 아무리 돌려 보아도 영상 속 아빠에게 가 닿지 못한다. 파편과 파편 사이의 공백은 상상으로만 간신히 채워지고, 불완전하고 조각난 기억은 자책과 후회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영화의 제목인 '애프터썬(aftersun)'은 햇빛에 노출된 후에 바르는 크림을 뜻한다. 강렬한 태양에 손상된 피부 위에 바르는 크림은 아프고 쓰라리다. 뒤늦게 떠올리는 기억 또한 안타깝고 먹먹하다. 나이가 들어도 끝내 좁혀지지 않는 소피와 캘럼의 거리는 나와 아버지의 그것과 겹쳐졌다. 캘럼은 젊은 날의 내 아버지였고, 소피는 열한 살의 나였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어서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그 시대 어른들처럼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한 적 없었다. 하지만 여린 풀처럼 작은 바람에도 쉽게 상처받는 섬세한 기질을 감출 수는 없었다. 미라처럼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살아오신 건, 어쩌면 상처를 견딜 힘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의 기억은 너무 단출해서 한두 줄로 요약될 만큼 결핍에 가깝다. 단둘이 떠난 여행의 기억도, 부녀지간에 오간 따뜻한 대화의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 손을 잡고 찾아간 식당의 후끈한 열기와 텅 빈 교실의 삐걱거리는 복도와 창으로 들어오던 나른한 빛, 밤색 실내화 같은 단편적인 기억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나이를 먹다 보면,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부모의 나이를 추월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세상의 비밀을 다 알고 있을 것 같던 그들이, 사실은 삶이라는 조각배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안타까운 연민과 슬픔이 밀려온다. 그 시절, 내 아버지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를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짐작하는 자식의 어리석음은 시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잔인한 진실이 아닐까. 언제나 너무 늦게 이해하고, 그제야 마음속에서 뒤늦은 대화를 시작한다. 그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왜 조금 더 다정하게 묻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시간의 건너편에서야, 나는 아버지의 고독한 뒷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다.


자식은 부모를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이 아닌 ‘역할’로만 기억하기 쉽다. 나를 키우고 책임지는 완벽해야 할 존재로 기대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한다. 하지만 부모 이전에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고 실패하고 흔들리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숨은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가 시작된다. 부모를 인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세대의 틈을 넘어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용서하는 동시에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뒤늦게 아버지의 삶을 상상하는 소피처럼, 나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아버지를 따라 걷는다. 그를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자, 아버지를 다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그 길 끝에는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얼굴이 있다. 무뚝뚝한 중년 남자의 얼굴 뒤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감정, 실패와 설렘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어리석은 딸은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누구의 자식이며 어떤 이야기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지도 자각하게 된다.


이제 나는 오래된 낡은 사진을 자주 꺼내본다. 그리고 사진 속 젊은 남자에게 말을 건다. “아버지, 그 시절엔 어떤 꿈을 꾸었나요? 그때의 당신도 나처럼 두려웠나요? ” 그에게 말을 걸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조금 더 가까워진다. 아버지를 상상하는 일은 결국 나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가 지나온 청춘의 길 위에, 지금의 내가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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