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몸에서 나온 겁니다” 의사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니 새까맣고 반질반질한 돌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돌은 몽돌 해수욕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과 다르지 않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사람 뱃속에 돌이,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기 양을 잡아먹은 벌로 뱃속에 돌이 가득 차는 고통을 당한 동화 속 늑대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 기이한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말풍선으로 떠올랐다. 도대체 아버지 뱃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갑작스럽게 복통을 호소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더니 담석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진단명을 듣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짧은 의학 상식으로도 담석증이 생명에 지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큰 걱정은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쉬는 사이 수술실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남자 직원이 이동용 침대를 밀면서 입원실로 들어섰다. 아무리 노인이지만 아버지도 남자이기에 얼마간의 몸무게를 예상한 직원은 한껏 힘을 준 채 아버지의 몸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힘을 준 손이 무색하게 이동은 싱겁게 끝났다. 건장한 남자가 들기에 아버지의 몸은 너무 가벼웠다. 수술은 서너 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아버지를 실은 침대는 수술실 입구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수술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를 훌쩍 넘긴 시간에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슬슬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전광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깐이라도 비운 사이에 연락이 올까 봐 화장실 가는 걸 제외하고는 붙박이 가구처럼 앉아 있었다.
대기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누군가를 수술실에 들여보낸 사람들의 얼굴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걱정과 근심을 무표정으로 포장하지만 감추기 어려운 흰 머리카락처럼 사람들의 몸과 얼굴 여기저기에 감정의 편린들이 묻어 있었다. 꼭 잡은 두 손은 간절한 희망의 다름 아니었고, 여자의 등을 다독이는 남자의 손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몸짓이었다. 우리는 유일신을 믿는 교인들처럼 한마음이 되어 가족의 무사 안위를 빌었다. 수술이 끝났음을 알리는 전광판의 불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늘어감에 따라 불안은 덩달아 커졌다. 떠난 자들이 남기고 간 근심과 걱정은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층 어두워진 분위기의 대기실에는 갈 곳을 잃은 눈동자만 방황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자리를 지켰던 사람마저 수술실의 호출을 받고 나가버리자, 대기실에는 우리 가족만 덩그러니 남았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대기실은 냉기가 감돌았다. 이제 불안은 공포로 바뀌었다. 수술실로 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은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까지 들면서 그동안 저지른 온갖 불효가 떠올랐다. 한 번 시작된 소설은 멈출 수가 없었고 예정된 비극을 향해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불안한 엔딩의 그림자를 애써 떨쳐버리려는 듯 황급히 추억 속으로 도피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교사들이 직접 숙직을 맡아서 했다.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것은 적적함을 달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일터를 보여주려는 가장으로서의 자부심도 얼마간 있었을지 모른다. 추억 속의 학교는 정적이 감돈다. 텅 빈 교사의 복도 위로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버지의 밤색 실내화가 펄럭이는 흰 커튼과 함께 플래시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깨진 기억의 파편을 하나 둘 모아 보지만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한다.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기억의 공백을 상상으로 채워보지만, 간신히 이어간 조각보는 곳곳이 비어있다.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한 남자의 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헛되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강렬한 태양에 손상된 피부 위에 바르는 선크림처럼 뒤늦게 떠올리는 기억은 아프고 쓰라렸다. 희미한 추억을 위안 삼아 불안한 현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눈앞에서 번쩍이는 전광판 앞에서 재빨리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나는 스프링에서 퉁겨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수술실로 냅다 뛰었다.
아버지의 노쇠한 몸은 불면 사라지는 먼지처럼 가벼웠다.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나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참담한 전쟁까지 겪었다.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진학은 고모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었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다. 고모들은 ‘희생’을 볼모로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내밀었고 아버지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고개 숙였다. 평생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는 고모들의 불행을 자신 탓이라 여겼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가난하던 시절, 월급쟁이 수입으로 세 아이를 기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고모들이 강요한 심리적 빚까지 물리적으로 되갚으려 했던 아버지의 삶은 애초에 ‘성공’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스로 ‘무능한 가장’ 임을 자처하며 단단한 등껍질 밑으로 숨어든 거북이처럼 세상과 거리를 두고 움츠러들었다. 학습된 무기력으로 피폐해진 실험실 동물 마냥 아버지는 점점 무기력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빠져나가는 돈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부모님의 관계는 낡은 기계처럼 삐그덕거렸다.
나이를 먹다 보면 어느새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부모의 나이를 하나둘, 추월해 가는 지점에 닿게 된다. 가엾지 않은 인생이 없겠지만 자식이 느끼는 부모의 삶은 모질고 고통스럽다. 어쩔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밀려온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것만 같던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했다. 삶이라는 조각배에 위태롭게 매달린 가엾은 인간일 뿐이라는 자각 앞에 당도하게 되면 젊은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슬픔과 분노를 안고 살았는지 뒤늦은 궁금증이 밀려온다. 하지만 고작 그 나이에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겪었을 아버지의 마음속 우물을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연로한 아버지의 의식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속에 나온 돌들의 절규가 환청처럼 귀를 울렸다. 가장의 무게에 짓눌린 아버지의 신음이, 마음 한 조각 내려놓을 자리 없는 외로움의 탄식이, 귀를 울렸다. 내 몸속에는 어떤 돌이 쌓여 있을까. 세 아이의 엄마로서 겪어야 했던 인고의 시간, 전통적인 성 역할과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했던 순간. 인간관계에서 받았던 복잡한 스트레스가 단단한 응어리로 굳어져 궁극에는 새까만 돌무덤이 되어 몸속 어딘가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건 아닐까. 한숨과 눈물이 켜켜이 쌓인 고통의 궤적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의 끝에는 쇠잔해진 몸과 폐허가 된 마음이 남았다. ‘사는 건 고통’이라는 명제를 굳이 빌어오지 않더라도 고난과 불행이 연속 상영되는 새드 엔딩 영화 같은 삶을 견뎌야 했던 아버지. 버거운 삶의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아버지 몸속에는 마치 징표처럼 하나, 둘, 돌이 쌓여갔던 건 아니었을까. 수술실 탁자 위에 놓인 한 무더기 돌은 말이 없다.
담석이 생성되는 원리는 ‘담즙의 주요 구성 성분인 담즙산과 인지질이 섞여 있는 미포 성 용액 내에 콜레스테롤 등의 지방질이나 무기염, 유기 염 등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해 과포화 상태가 되면서 침전되는 것’이라고 네이버 지식 백과사전은 알려주었다. 알 수 없는 의학용어가 난무하는 사전적 정의는 아버지의 삶 한 조각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늙고 노쇠한 몸으로 긴 수술을 견디느라 핏기가 사라진 얼굴과 창백한 입술은 고통의 물리적 증언이었고 까맣고 반질반질한 돌멩이는 오랜 시간 참고 견딘 고통의 추상적 현시였다. 슬픔 하나, 불행한 줄, 고통 한 조각이 켜켜이 쌓인 돌무덤. 무너져 내린 마음의 잔재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말없이 아버지 곁에 섰다. 고통의 파편이 제거된 아버지의 몸은 이제 가벼워졌을까. 고른 숨소리가 병실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