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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오웰에게 배우는 글쓰기의 윤리

내가 꽤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선의’는 가졌다고 믿었다. 불의에 분노하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고 싶었기에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당위에 별 의심 없이 살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책상에서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클릭하고, 기분 좋은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 카페에서 정의니, 양극화니 하며 떠들어댔다. 나의 도덕은 그렇게 안온하고 깔끔한 ‘관념’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견고했던 나의 ‘선의’가 ‘위선’이고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이 책은 1930년대 대공황의 한복판, 잉글랜드 북부 탄광촌의 현실을 기록한 르포이자 정치 에세이이며 이후 그의 작품의 사상적 뿌리가 된 작품이다.. 책을 통해 참혹한 노동현실과 비참한 가난의 현실을 통해 탄광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멀찍이 거리를 둔 채 팔짱을 낀 채 그들을 관찰하는 나의 민낯만 확인하게 되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1부에서 오웰은 활활 타는 지옥불만 없을 뿐 우리가 지옥이라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있는 탄광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다. 어떤 과장과 미화 없이 건조하게 그려내는 탄광촌의 삶은 참혹하다. 그는 빈곤이 개인의 나태함이 아닌 사회 구조적 모순임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가난은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일임을 탄광촌에서의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깨닫게 된다.


이어 오웰은 비판의 칼날을 느닷없이 자신에게로 돌린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꽤 자유롭게 쓰곤 하던 섬뜩한 말,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이 고백 속에서 그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고 싶지만, 그들의 ‘냄새’를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웰은 스스로 노동자의 편이라 믿었으나, 몸에 밴 ‘중산층의 감각’을 끝내 버리지 못한 모순을 인정한다. 가난을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현실을 ‘몸’으로 겪은 적 없는 중산층의 허위의식이 그 자신 안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는 통찰 속에서, 그는 사회주의자의 관념을 지지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의 몸을 꺼리는 자신의 이중성을 뼈아프게 드러낸다.


오웰이 말한 ‘관념’과 ‘몸’ 사이의 괴리는 거창한 이념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 또한 허위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환경보호를 외치면서도 매일의 불편함 앞에서는 일회용 컵의 편리함에 쉽게 굴복한다.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에는 동의하지만, 그에 따르는 ‘몸’의 수고는 피하고 싶다. 골목상권을 살려야 한다는 대의에는 공감하면서도, 빠른 서비스와 편리함을 앞세운 대기업 배달앱을 망설임 없이 누른다. 외국인 혐오에 분노하면서도 전철에서 마주한 이방인의 낯선 향과 말투에 불편함을 느끼고 무심히 거리를 두는 본능적 회피 역시 오웰이 고백한 내면의 모순과 맞닿아 있다.


그는 가난을 관념적으로 바라보는 중산층의 시각을 비판한다. 가난은 도덕적 충고나 한 줄의 통계로 요약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냄새’와 ‘수치심’, ‘피로’라는 생생한 감각으로 드러난다. 이 감각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오웰의 윤리의식이다.


그는 작가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화려한 수사나 추상적인 단어를 배제한 담백한 문체를 통해 표현한다. 오웰은 설교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수사나 기교에 기대지 않고, 그저 끝까지 상황을 응시하며 자신이 본 진실을 기록한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그의 문장은 독자에게 도덕적 판단이 아닌 ‘진짜 감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는 관념적인 언어가 본질을 흐리고 진실을 안갯속에 가둔다고 믿었다. ‘정치와 영어’에서 언어의 타락과 사고의 타락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지적한다. 생각이 불분명하면 언어가 빈곤해지고, 그렇게 타락한 언어가 다시 사고를 더 어리석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명료한 문장은 단순한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도덕적 실패였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이런 오웰의 문체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미사여구를 철저히 배제하고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한 채,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한다. 문체의 도덕성이 곧 작가적 윤리였기에, 언어를 통한 자기 검열은 그의 문학의 핵심이었다. 오웰이 단순한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윤리적 책무를 끝까지 놓지 않은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눈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며, 그 자리에서 본 것을 증언한다. 고통의 현장에 자신의 몸을 옮겨 생생히 체험한 것만을 기록하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인간의 고통과 불의를 말하지만, 때로는 감정에 휩쓸리거나 미학에 매몰되어 동정과 연민의 수준에 머무르곤 한다. 그러나 오웰의 글쓰기가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그의 문장이 진실을 향한 인간의 고투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체란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윤리적 태도였다. 오웰은 정직한 글, 거짓 없는 문장으로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간결하고 꾸밈없는 문체가 그의 글에 더욱 강한 진정성을 부여했다.

문장은 점점 더 화려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미사여구 속에서 의미는 희미해지고, 진실은 쉽게 가려진다. 정직한 언어를 쓰려는 노력 속에는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려는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오웰은 문체를 통해 끊임없이 ‘양심의 투명성’을 추구했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진실 앞에서는 누구보다 단호했다. 그것이 오웰 문체의 힘이자 도덕성이다. 그는 진실을 왜곡하지 않았고, 가난을 미화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허위를 숨기지 않았다. 오웰은 언어가 인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정직함에 있다고 믿었다.


작가란 결국 타인의 고통을 관찰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그 고통을 기록하는 일에는 언제나 죄책감이 뒤따른다. 오웰은 현실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시선을 의심했고, 그 시선의 윤리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는 작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그 무게를 기꺼이 감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한 가지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어떤 위치에서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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