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1959년, 캔자스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부유하고 존경받던 농부 클러터와 그의 아내, 십 대의 두 자녀 낸시와 케니언은 전과자 페리와 딕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이후 두 범죄자는 멕시코와 미국 전역을 거쳐 도주하고, 소설은 이 과정을 추적하는 수사관 앨빈 듀이의 내면과 두 범죄자의 심리를 교차하며 밀도 있게 따라간다. 결국 그들은 붙잡혀 재판을 받고, 복역 끝에 교수형을 당한다. 커포티는 이 실제 사건을 냉정한 관찰자로서 재구성함으로써 ‘논픽션 노블’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일기가 문학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거리두기’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일기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토해낸 기록이며, 작가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감정에 매몰되어 쓰기 때문에 사적인 분노, 미정제된 표현이 고스란히 남는다. 곧, 일기는 경험 그 자체다.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이 경험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문학은 경험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고 재구성하며 의미를 발굴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극히 사적인 사건조차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듯 객관화해야 한다. 감정을 직접 흘려보내기보다 장면과 기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심지어 끔찍한 순간 앞에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보잘것없는 돌멩이가 세공을 거쳐 보석이 되듯, 글쓰기에서의 ‘세공’은 곧 거리 두기의 과정이다. 자기 경험에 함몰되지 않고 적절한 거리에서 바라볼 때, 사적인 기록은 비로소 보편성을 획득한다.
실제 사건을 다루는 논픽션 작가에게 이 ‘거리두기’는 글의 성패를 좌우한다. 너무 가까우면 감정에 눈이 흐려지고, 너무 멀면 피상적 사실 나열에 머문다. 트루먼 커포티가 6년의 취재 끝에 세상에 내놓은 『인 콜드 블러드』는 이 위험한 균형 위에서 쓰인 작품이다. 사건 소식을 접한 그는 곧바로 캔자스로 향했고, 치밀한 취재와 방대한 인터뷰, 자료 조사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했다. 그는 기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면서도 소설가처럼 장면을 구성하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러나 ‘사실을 어디까지 문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논픽션 노블이 피할 수 없는 난제이기도 하다.
커포티의 글쓰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일종의 창조주가 된다. 인물을 재단하고 사건을 배치하는 힘을 갖는다. 하지만 커포티는 가능한 한 냉정한 관찰자로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살인범을 악마화하지 않았고, 인간의 나약함과 폭력성, 무너져내리는 삶의 허약함을 포착하고자 했다. ‘사실’을 ‘문학’으로 끌어올리려는 그의 집요함은 우리가 글을 쓸 때 고려해야 할 대상과의 거리두기 문제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가 유지하려던 거리는 페리 스미스와의 관계에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페리의 유년기 상처와 예술적 감수성에서 자신을 보았던 커포티는 점점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두 사람은 단순한 취재자–피취재자의 관계를 넘어서는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인간적으로는 페리가 사형을 면하기를 바라지만, 작가로서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끝까지 기록해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이 모순 속에서 커포티는 결국 기록자의 위치를 선택했고, 페리의 사형이 집행된 후에야 책은 완성되었다.
‘논픽션 노블’은 허구적 문체로 사실을 재현하는 장르다. 그러나 그 재현의 언어 속에는 이미 작가의 개입이 선행된다. 어떤 장면을 먼저 배치할 것인지, 인물의 내면을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지, 페리의 어린 시절을 강조할 것인지,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선택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완벽한 거리 두기와 완벽한 객관성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모든 글쓰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포티가 말한 ‘완벽한 거리두기’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실패는 오히려 그가 작가이기 이전에 불완전한 인간임을 보여준다. 그의 글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이 인간적 모순을 숨기지 않고, 흔들리는 스스로를 끝까지 직면했다는 사실에 있다.
커포티가 보여준 ‘작가의 거리’는 완벽한 중립성도, 무분별한 감정이입도 아니다. 그 사이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겨우 확보되는 균형이다. 문학이 포착할 수 있는 진실은 이 미세한 진동, 두 극단 사이에 놓인 좁은 틈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결국 거리 두기란 감정을 삭제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글일수록 작가는 책임 있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대상화도 회피도 아닌, “가까이 다가가되 함몰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되 무심하지 않은” 그 미세한 거리에서 글은 긴장을 얻고 생명을 갖는다.
글쓰기란 결국 ‘어디에 서서 바라볼 것인가’를 조정하는 끝없는 과정이다. 그 조정을 통해 사적 경험은 타인에게 열리고, 기록은 문학으로 변모한다. 문학의 씨앗은 바로 이 사이의 감각에서 발아한다. 어쩌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그 거리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여정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