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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박완서에게 배우는 정직한 문장의힘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1988년은 작가 박완서에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바닥을 경험한 해였다.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아들마저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었다.『한 말씀만 하소서』는 바로 그 절망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글이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 이유는 비극 그 자체가 아니다. 박완서는 그 고통을 화려한 문장으로 승화시키지 않았고, 감정을 서정적으로 장식하지도 않았다. 그저 솔직하고 용기 있는 방식으로 고통을 마주했다. 어떤 꾸밈도 없이 문장을 벌거벗기는 용기로 말이다.


대부분의 글쓰기는 감정의 밀도를 높여 표현하려고 애쓴다. 슬픔을 더 슬프게, 고통을 더 깊게, 절망을 더 절망적으로 묘사하려는 충동은 글 쓰는 이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증폭’은 오히려 독자를 멀리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다. 감정이 과잉될수록 독자는 인물과 사건에 스스로 거리를 두게 되고, 슬픔의 현장은 신파적인 무대로 변한다.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려야 할 문장은 점점 관찰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만 머물 뿐이다.


반면 박완서의 글은 절제되고 투박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식어를 최소화하고, 일부러 꾸미지 않는, 마치 말라붙은 나뭇가지 같은 문장들. 하지만 바로 그런 투명한 문장들이 독자의 마음을 정통으로 찌른다. 이유는 분명하다. 감정을 부풀리지 않았고, 해석을 덧씌우지 않았으며, 고통의 결을 있는 그대로 노출했다. 이것이 바로 벌거벗은 문장의 용기다. 힘을 과시하지 않지만, 오히려 힘이 된다. 감정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데도 감정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박완서는 아들의 죽음 직후에도 허기를 느껴 밥을 먹는 자신을 ‘짐승스럽다’고 기록했다. 평생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마음, 어떤 서사 속에서도 빼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순간이지만 박완서는 이마저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까지 정확한 문장으로 옮겼다. 이는 글쓰기 이전에 요구되는 인간으로서의 용기이며, 동시에 진정한 문학을 빚어내는 출발점이다.


‘부끄러움의 노출’은 작가를 초라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순간 독자는 작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인간적인 시행착오, 흔들림, 비루함을 숨기지 않는 태도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강력한 신뢰를 세운다. 글쓰기에서 ‘신뢰’는 그 어떤 문학적 기교보다 강력한 힘이다. 독자는 완벽한 문장보다 솔직한 문장을 더 오래 붙잡는다. 아름다운 문장은 감탄을 끌어내지만, 솔직한 문장은 공감을 끌어낸다. 그리고 공감은 독자의 마음을 여는 유일한 열쇠다.


박완서의 기록은 문학적 성취를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는 감정을 예쁘게 다듬거나 고상한 서정으로 승화시키는 대신, 고통이 자신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글쓰기라는 도구에 의지했다. 분노와 절망이 몸속에서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감정을 ‘문자’라는 틀 안에 가두고, 글을 쓰면서 흘려보냈다. 이는 종교적 구원도, 철학적 이해도 아닌, 가장 비문학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문학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살기 위해 쓴 문장’은 독자를 가장 깊이 흔들었다. 박완서의 문장 앞에서 독자는 감정을 소비하는 관객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 한가운데서 떨고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이 된다. 그가 고통을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독자의 마음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통과한다. 화려한 문장이 줄 수 없는 날카로운 진실의 힘이 독자의 가슴을 강타한다.


이 솔직한 기록은 결국 개인의 비극을 넘어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된다. 박완서는 글쓰기의 과정에서 “왜 하필 나인가(Why me?)”라는 질문에서 “나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Why not me?)”라는 성찰로 나아간다. 이는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타인의 세계로 건너가는 회복의 순간이다. 고통을 객관화할 때, 그 고통은 더 이상 폐쇄적인 상처가 아닌, 타인과 연결되는 지점이 된다.


결국 박완서의 벌거벗은 문장은 독자에게 “당신만 아픈 것이 아니다”라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연대를 건넨다. 위로는 큰 문장에서 오지 않는다. 솔직함에서 온다. 감정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문장은 더 넓은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솔직함이 문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 생명력은 곧바로 독자의 마음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힘이 된다. 박완서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이것이다.


좋은 글은 화려하게 잘 꾸민 문장, 즉 미사여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살아 숨 쉬는 글은 솔직함에서 태어난다.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낼 수 있는 용기, 가장 부끄럽고 초라한 감정까지 가감 없이 글로 옮길 수 있는 결단이 문장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때 문장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생생한 증언이 되고 한 사람의 삶 자체가 된다.


찌질함과 비루함까지 드러내는 그 정직함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강력한 미덕임을 박완서 작가는 치열하게 증명해 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감정을 증폭하거나 과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 지나간 자리의 생얼을 끝까지 바라보려는 감수성이다. 고통을 포장하지 않고 견디는 태도는 작가의 문학적 윤리를 넘어, 삶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인간적인 용기다. 그리고 바로 그 용기 위에서만, 진짜 문장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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