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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이승우, 사랑에 대한 정직한 보고서


이승우의 소설 『사랑의 생애』는 네 명의 남녀, 준오, 영석, 선희, 형배를 통해 사랑의 무궁무진하면서도 잔혹한 속성을 탐구한다. 각 인물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관계의 단면을 비추며, 독자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모든 사랑에 열려 있고 언제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준오는 사랑의 대상을 개별성에서 찾는다. 사람마다 고유한 빛과 그림자가 있기에 사랑의 형태 또한 무한히 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시선은 사랑의 다양성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준오의 방식과 대극점에 서 있는 인물은 영석이다. 영석에게 사랑은 생존 그 자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나무를 움켜쥐는 덩굴처럼 상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영석의 사랑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무기로 삼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며 절규다. 소설은 여기서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강한 자는 더 강한 힘으로 꺾을 수 있지만, 속수무책의 약함 앞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저항할 수 없다. 선희가 영석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 ‘약함에 대한 굴복’에 있다.


형배와 선희의 관계는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과거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선희를 거절했던 형배는,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선희에게 뒤늦게 사랑을 느낀다. 그는 예전의 선희가 아닌 새롭고 다른 여자를 발견하고 매혹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애초부터 오만에 가로막혀 있다. 형배는 과거 선희가 자신을 향해 품었던 감정에서 오는 우월감, 그리고 현재 선희의 연인인 영석보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이로 인해 형배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는 약함, 즉 연민 또한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선희의 마음을 되찾는 데 실패한다. 세상에는 세상에는 강함에 이끌리는 사랑도 있지만, 연민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선희의 마음은 후자가 지배했다. 형배배의 오만은 이 단순한 진실을 보지 못했고, 선희는 그의 결정적인 이별을 고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소설의 첫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을 선명히 드러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거대한 힘에 '빠지는' 수동적인 객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은 그래서 정확하다. 이 말 자체가 이성적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태를 은유한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사랑'의 숙주일 뿐, 진정한 주체가 되지 못한다. 사랑의 주체는 연인 개인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이 내부에서 자라나고 주도권을 쥐며 우리의 선택과 행동을 좌지우지한다. 소설은 이 불가항력적 힘을 기묘하고도 사실적으로 기록한다.


형배의 오만은 어머니를 통해 무너진다. 어린 시절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아버지가 늙고 병든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의 곁을 지키기로 한다. 젊고 힘 있을 때의 아버지가 아닌, 피폐한 삶의 흔적을 온몸에 새긴 약한 남자를 어머니는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형배는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에는 약함으로 이끌리는 길, 연민이 사랑으로 변하는 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는 끝내 닿지 못한 길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은 깨달음 앞에서 형배는 자신이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음을 처절하게 인정하게 된다.


『사랑의 생애』는 사랑이 결코 아름답거나 낭만적인 감정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때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며, 때로는 약함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굴복이고, 때로는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는 숙명이다. 작가는 네 명의 인물을 해부하며, 사랑이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여 존재를 지배하는 기생적인 생명력임을 역설한다. 결국 이 소설은 사랑이 어떻게 한 생명체(숙주)의 내부에서 시작되어 그 생애를 관통하는지를 보여주는, 쓰라리지만 진실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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