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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14. 2019

<조커>의 비열함을 알면서도 속지 않을 수 없었다

조커의 모든 분노는 변혁의 외침이 아니라 욕구충족 실패에 따른 단순 발길질에 불과하다. 영화는 이를 노동계급 전선 형성을 위한 필연으로 둔갑시킨다. 또한 아름다운 춤으로, 노래로 관객을 현혹한다.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원초적인 본능에 따른 결과물을 치밀한 혁명으로 보이게끔 연이어 속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조커를 만들었다'는 거짓말이다. 폭력의 미화가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거짓말이 문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동시에 사회적 우화이다. 찰리 채플린이 나오고, 정부의 책임이 나온다. 웃기기만 해야했던 광대와 난쟁이가 화해하고, 평가하고 웃을 줄만 알던 갑부와 은행원이 더이상 웃지 못한다.


정교하게 짜여진 그물같은 사회적 고통 앞에서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다면, 또한 몇 번이고 이미 좌절했다면 인간은 고통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없다. 표출된 형태가 각성이든, 본능이든 폭력은 억압받는 자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권리다.


영화는 끝까지 억압받는 다수의 계급 연대로 조커를 포장하고, 역시 아름답다고 속인다. 거짓말이다. 도시는 불타고 있고, 경찰이 쓰러지고 있다. 구급차가 넘어간다. 여기서 조커는 춤추고, 배경음악은 아름답게 깔린다.


비열한 대목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속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여기서 차분함을 강요하다면 그것이야말로 폭력이다. 권리로서 폭력은 억압하는 자가 아니라 억압받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 반대의 폭력은 철폐되어야 한다. 너무나 드물게 일어나지만 말이다. 조커의 폭력을 폭력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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