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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Feb 26. 2021

친구 관계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들

학창 시절 단짝처럼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대학 생활과 이사로 서로 연락하고 만나는 횟수가 적어지며 서서히 멀어졌다. 그래도 오래도록 함께한 청소년 시절의 시간은 추억으로 남아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문득 핸드폰의 번호를 바라보며 통화할 사람을 찾다가 그 친구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신호음이 멈추고 두근거리는 마음은 삽시간에 차갑게 식고 말았다. 그 친구는 "왜"라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통화에 응답했다. 그동안 나 혼자 가슴앓이 한 것처럼 속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당시에는 배신감에 사무쳐 분노하며 그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에게 첫마디가 그거냐"라며 맞받아쳤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를 읽어보며 친구라는 관계가 어떤 상태였는지 알게 되었다. 애초에 그 친구는 관계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닐까.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려고 오히려 내가 의존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를 발견했다. 그 친구는 자신에게 의존했던 내가 조금은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무언가 배려하며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을 회상해보면 거의 대부분 내가 먼저 연락하고 자초한 일이었다. 그런데 친구니까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나 보다.

인간관계는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람이 쏟는 정성을 수치로 표현하면 이러한 관계가 명확해지겠지만, 저울질이 가능하게 측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서로 간의 입장 차이로 심리에 미묘한 엇갈림이 발생하고,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간다. 저자는 마음이 불편한 오래된 관계는 비단 타인의 잘못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아낌없이 준다고 착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관계에서 아무리 상대방을 배려해도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무언가 바라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무의식에서 온갖 향연이 펼쳐진다. 지속적인 관계는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무언가를 베풀어도 오히려 기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학창 시절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시절에는 친구였을지 몰라도 현재는 친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속은 것은 아니며, 배신은 더더욱 아니다.



언제까지 상대에게 맞춰주기만 할 텐가

한 가지 착각하고 무지했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친구는 '누울 자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관계가 상호성이 아닌 일방성으로 전환되어 피해를 보는 쪽이 생기는 경우를 뜻한다. 먼저 연락하는 사람도 나였고 함께 PC방과 술을 마셔도 돈을 더 내는 사람도 나였다. 그래서 금전적으로 항상 그 친구에게 아낌없이 주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마음이 불편하고 손해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은 늘 손해를 본다. 이들이 자신이 손해를 덜 본 지점에서 끝을 낼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결국 자신이 조금 더 손해를 봐야만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80p


오히려 그 친구와 함께 한 시간이 나에게도 이득이었다는 생각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 보면 나도 그 친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고, 함께 한 시간은 상호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관계에서 손해를 보았다고 저울질을 하더라도 관계에서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마음과 다른 관계를 맺기 어려워 유독 그 친구만을 찾았던 이유가 함께 공존한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에서는 이처럼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을 자극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81p


질문을 살펴보면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손해 보기 싫은 감정에서 자유롭게 사는 건 쉽지 않다. 어느 정도 균형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자신이 어떤 성질의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관계에서 얻는 이익이 크다고 생각한다면 양보와 배려를 어디까지 허용할지 인지해보자. 균형 잡힌 관계가 아니라면 과감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용기도 필요하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문구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미움받는 행위는 견디기 힘든 감정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감정을 과감히 드러내면 상대방에게 미운 털이 박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움받을 용기만 가지면 관계에서 오는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현실은 만만하지 않다.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데 아무렇지 않다면 그건 기현상이다. 용기를 내어 감정을 털어놓아도 잠시 동안은 위안이 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 위의 갑옷에 짓눌리는 날이 온다.



본래 가족이 더 이기적이다

친구라고 생각한 관계에서 균형감이 무너지면 그저 각자 살길을 찾아 살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불안전한 가족관계는 끊어질 듯 말 듯 계속 연결되어 상처를 낫지 못하게 한다. 가족의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가족 간의 정서적 폭력이 상당하다. 자녀가 여럿인 집일수록 '희생하는 자녀', '희생하는 엄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래 부모와 자식은 서로 선택하거나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끊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관계 아닌가요? 그냥 수용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니다. 그렇지 않다.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거절해도 된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116p


거절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오래도록 알지 못하고 지냈다. 이 사실만 분명하게 인지해도 관계의 판도가 달라진다. 역설적으로 끊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두려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아마도 가족 관계에 시달린 사람들은 그동안 단절과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 관계가 끊어지지도 버려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부모와 자식 간의 강요는 어쩔 수 없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엄마조차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공평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배려를 배려에서 끝내지 않는다. 상대에게 그다음을 원한다. 교류가 일어날 때마다 이들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저울질이 일어난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164p


항상 친구와 관계에서 주기만 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사실은 받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언제나 관계에서 경제적인 측면으로 판단하면 당연히 준다고만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이 내면에 자리 잡으면 점점 감정을 억압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한계점을 넘게 되면 한꺼번에 분출하고 만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오는 만족감은 '심리적인 자원'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베푸는 행위로 만족감을 느끼는 '돕는 자의 희열'도 교류에서 발생하는 자원이다. 그렇지만 결국 감정이 상하는 타이밍은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감정을 조절해서는 안 된다. 감정의 조절은 심각한 말의 오해라고 볼 수 있다. 기쁨, 분노, 슬픔과 같은 감정은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조절해야 하는 건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 표현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어떤 게 표현하는지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감정을 조절하라는 의미는 수용하고 느끼라는 뜻이다.



'어쩔 수 없이'는 실패를 덮는 이불이다


원치 않는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도 고민이 앞선다. '과연 이 사람과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 사람과의 관계는 어쩔 수 없어. 그냥 이대로 사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아."와 같은 결론을 지어 버린다면 십중팔구 무기력증에 빠진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216p


관계에서 가장 힘든 상황은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에 지배당할 때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압도당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사람은 무기력하게 변한다. 상대에게 휘둘림을 당하면서도 그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나만의 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어쩔 수 없는 관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타인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살피는 사람은 타인보다 내 감정을 먼저 들여다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욕구가 먼저다. 타인의 욕구는 그다음에 살펴보아도 충분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상대가 싫어할까 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다. 타인이 밉고 싫지만 그래도 관계를 지키고 싶은 욕구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해결책이 보인다. 무엇인가 얻기 위해 다른 무언가는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관계를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 이러한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그 어렵다는 관계에서 조금은 안정감을 누리지 않을까.




참고 도서 :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저자 : 성유미

출판 : 인플루엔셜

발매 :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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