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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팀장의 관리 방법은 육아와 비슷하다.

by 곽준원
아이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살아야 한다'라는 목적 하나만 가진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아이는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배고프면 누구를 불러야 하고, 기저귀가 불편하면 도와줄 사람을 불러야 하고, 안아달라고 떼쓰고, 잠을 못 자면 품을 찾아야 합니다.


아이는 온전히 의존적인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은 단 하나뿐입니다.


울음.

울음은 그냥 소리가 아니라 신호입니다.


“나 여기 있어요.”

“나 지금 괜찮지 않아요.”

“지금 나 좀 봐주세요.”

“나 혼자 두지 마세요.”


이 신호에 양육자가 반응하면 아이는 한 가지를 배웁니다. '세상은 위험하지만, 나는 완전히 혼자가 아니구나.' 그렇게 아이의 마음속에는 기본 안정감이 조금씩 쌓입니다.


“내가 무너질 땐 누군가 나를 들어 올릴 거야.”

“내가 불편하다고 말하면 그 말은 닿을 수 있어.”


반대로 아무도 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울음은 점점 줄어듭니다. 줄어든다는 게 편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포기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안 오네.”

“아무리 말해도 변하지 않네.”

“그렇다면 그냥 말하지 말자.”


그 포기는 감정이 줄어든 게 아니라, 표현이 접힌 상태입니다. 그 접힘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대로 굳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커서도 배웁니다.


“말해봤자 소용없다.”


저는 이 과정을 육아에서 직접 봤습니다. 피곤해서 한 번 대충 넘길 때와, 아이가 칭얼거릴 때 바로 반응해 주는 순간의 차이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반응해 주면 아이는 금방 진정합니다.


“아, 여기 있구나.”


무시하면 아이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갑니다. 그 눈빛은 금방 조용해지지만, 대신 깊게 멍이 듭니다. 중요한 건 그겁니다. 아이는 혼자 두면 조용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편안해져서’가 아니라 ‘포기해서’ 조용해진 겁니다.


팀도 혼자 굴러가지 않는다

회사의 팀 운영도 저는 비슷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 시기의 제 팀에서요. 사람이 열네 명이었습니다. 프로그래머들만 줄을 길게 늘어놓고 앉아 있는 구조. 각자 맡은 파트도 달랐고, 기여 방식도 달랐고, 업무 스타일도 달랐습니다. 이 정도 규모가 되면 규칙이 필요합니다. 기술적 규칙도 필요하고, 협업 규칙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입니다. 작업한 코드는 어디까지 리뷰를 거쳐야 하는가. 밤샘·야근 패턴은 어느 지점까지 허용하고 어디서부터는 제동을 걸어야 하는가. 일정이 밀렸을 때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다른 팀과 충돌이 났을 때 누구를 통해 정리해야 하는가. 반복적으로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있을 경우 무엇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가.


이건 결국 '팀의 안전장치'입니다. 아이가 울면 누군가 와서 안아주는 것처럼, 팀 안에서 누군가가 위험 신호를 내면 그 신호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보통 누가 하죠?

팀장입니다.


팀장은 코드를 직접 가장 많이 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팀장이어야 하는 역할은 존재합니다.


그건 '일의 진행 상황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팀장은 문제를 대신 다 해결해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저기서 무슨 신호가 나오고 있다'를 가장 먼저 알아차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팀에는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사실상 없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팀장은 ‘부재’ 그 자체였다

그 시기에 우리 팀장님은 존재는 했습니다. 사라진 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는 회사에 있었습니다. 주간 회의에도 참석했고, 스튜디오에서 내려오는 공지나 일정을 전파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했습니다. 팀원들에게 체감되는 팀장의 역할은 이것뿐이었습니다.


스튜디오 전체 회의에 나간다. 거기서 들은 내용을 요약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즉, 다리 역할. 전달자 역할. 그 이상의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들 몰랐습니다.


“팀장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피드백을 하는 장면을 본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지쳐 보이는 날, 그 사람과 자리를 따로 잡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팀 안의 마찰이나 반복되는 갈등을 조정하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팀장은 점점 이렇게 인식됐습니다.


“아, 그냥 관리직 포지션.”

“우리가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고.”


다시 말해, 그 사람은 팀장이라는 직함을 가졌지만, 정작 팀의 감정, 체력, 갈등, 균열을 다루는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걸 ‘부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어도 부재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 앞에 있어도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 시기의 우리 팀은 정확히 그 상태였습니다.


방임과 자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상황을 바깥에서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오, 자율적인 팀이네?”

“팀장이 딱히 간섭 안 하네?”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겠네?”


그럴싸한 말입니다. 얼핏 들으면 자유와 신뢰가 있는 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자율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방임이었습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자율은

“네가 스스로 결정해도 좋아.

대신 그 결정에서 생기는 책임은 같이 보자.

힘들면 말해라. 내가 받을 준비가 돼 있다.”

라는 관계입니다.


방임은

“네가 뭘 하든 나는 신경 안 쓴다.

과정도 결과도 네 알아서 해라.

문제가 터지면? 그건 네 문제다.”

라는 관계입니다.


자율에는 관계가 있고, 방임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자율은 ‘너를 믿는다’의 형태고, 방임은 ‘나도 너도 각자 살아라’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그때 자율을 누리는 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방치된 팀이었습니다. 누군가가 힘들다고 말해도, 그건 그 사람의 부담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규칙을 어겨도, 그건 그냥 그 사람의 캐릭터일 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행동이 팀 전체에 피해를 줘도, 누구도 나서서 말을 정리해주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방 안에 어른이 있긴 있어요. 근데 그 어른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장면에 가까웠습니다.


“너 울든 말든 알아서 해.”


규칙이 무너질 때 생기는 일

팀이 열네 명까지 커지면, 규칙은 선택이 아니라 기반입니다. 규칙은 단순한 통제 수단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팀원 중 누군가는 약속된 형식대로 코드를 남기지 않습니다. 리뷰 과정 없이 마음대로 메인 브랜치에 밀어버립니다. 공유된 에셋에 충돌을 일으키고도 아무 말 없이 퇴근합니다.


아예 회의에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와도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은 단순히 '저 사람 스타일이 원래 그래'라고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팀 전체의 신뢰를 갉아먹습니다.


이건 13명이 쌓은 신뢰를 1명이 꾸준히 깨부수는 장면입니다. 즉,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공동체의 리스크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리자는 최소한 세 가지는 해야 합니다.


시정 요청.

“지금 이건 우리가 합의한 규칙과 다르다. 앞으로는 이렇게 해달라.”

단순히 혼내는 게 아니라, 기준을 언어로 명확하게 박아주는 일입니다.


맥락 파악.

“요즘 왜 이런 식으로 일해? 뭐가 힘들어? 일정이 말이 안 돼서? 체력이 떨어져서? 아니면 팀의 방식 자체가 너한테 안 맞아서?”


그 사람의 환경과 심리를 확인하고, 이게 개인 문제인지 구조 문제인지 진단하는 일입니다.


조정.

대체 배치를 하든, 리소스를 재분배하든, 일정을 고치든, 팀 내 합의를 새로 열든 무언가를 조정하고 책임을 잇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하는 게 관리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하지 않으면 그건 관리가 아니라 방임입니다. 그런데 우리 팀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팀장은 그냥 조용히 있었습니다.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아서 해라'라는 메시지만 공기처럼 떠돌았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간단합니다. 팀원들이 서로를 깎아내기 시작합니다. 관리자가 해야 할 갈등 조정을 팀원들이 서로 직접 하려 들면, 그건 해결이 아니라 내상으로 끝납니다.


“쟤 때문에 일이 막히잖아.”

“왜 아무도 쟤한테 얘기 안 해?”

“내가 말하면 싸움 나겠지?”

“그럼 결국 내가 참아야 해?”


그 지점에서 팀은 무너집니다. 기술이 아니라 신뢰에서부터. 결국 사람은 기능으로만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피할 수 없다: 이전 팀장 vs 지금 팀장

저는 이전 회사에서도 팀장을 겪었습니다. 그 팀장은 코드를 정말 잘 짰습니다. 그건 기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건 태도였습니다. 업무에 임하는 자세, 동료를 대하는 방식, 일정이 어려울 때 말 꺼내는 방식, 책임지는 방법. 그 자체가 일종의 교과서였습니다.


“아, 저렇게 하는 게 맞는구나.”

“저렇게 말하면 상대가 무너지지 않는구나.”

“저런 표정으로 버티는 게 가능하구나.”


저는 그런 사람 옆에 있기만 해도 배웠습니다. 굳이 강의가 없어도, 옆에서 보고 흉내만 내도 제가 성장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롤모델’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새 회사의 팀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갈등을 조정하지 않았습니다. 다툼을 중재하지 않았습니다. 지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지도 않았습니다.


개발적으로 후배가 참고할 만한 코드나 작업 태도를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주간 보고를 들었다가 가져오는 통로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돌봄 받지 못하는 팀이다.”


그래서 나는 더 무너졌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제가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 저는 이미 체력적으로 바닥 가까이 가 있었습니다.


완벽주의에 갇혀 있었고, 일에 몰입하지 않으면 숨을 못 쉬었고, 집에서는 육아와 책임이 동시에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잠도 부족했고, 아내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질문은 매일 새벽마다 마음속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와서 기대야 할 자리가 없습니다.

“이 정도면 좀 쉬세요.”

“이건 내가 받을게.”

“지금 네가 이런 표정 짓고 있다는 건 위험하다는 뜻이야.”


이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부재는 더 깊게 작용했습니다. 그 부재는 저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습니다. 더 날카롭게 만들었습니다. 더 공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더 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 여기서는 내가 안 버티면 아무도 안 버티는 거구나.”


아이를 돌보는 양육자가 없는 집에서, 아이가 스스로 자기 울음을 삼키는 상황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는 오래 버티면 안 되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 버텼습니다. 그 대가를 나중에 치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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