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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가족과 떨어져 지낸 1년.

by 곽준원
'개발자는 어디서든 개발하면 된다'는 믿음

게임 업계를 떠나 새 회사로 옮겼을 때, 저는 단순하게 생각했었습니다.


“프로그래밍은 어디서나 똑같이 프로그래밍이지.”

“화면에 맞은 값이 나오고, 로직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면 그게 개발이지.”


이직을 결정할 때 제 머릿속은 철저히 ‘돈’이라는 한 단어로 정렬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야가 다르다는 건 제게 큰 변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들어가 보니, 그건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게임 클라이언트 개발자였고, 제가 다루던 것은 플레이어의 입력, UI, 이펙트, 스킬 타이밍 같은 디지털 상호작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회사에서의 저는 설비, 광학, 이미지 프로세싱, 공정, 검사 라인, 품질 판별이라는 물리 세계 위에 올라와야 했습니다. 단순히 화면상에서 ‘잘 돌아간다’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짠 소프트웨어는 실제 설비와 연결되어 제품의 불량 여부를 판별해야 했습니다.


카메라가 찍은 이미지를 분석하고, 기준과 허용 오차를 적용하고, 처리 결과를 눈앞의 기계가 실제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즉, '코드가 돌아가는가?'는 이제 출발점에 불과했습니다. '그 코드가 라인 위의 설비와 정확히 같이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이 최종이었습니다.


머릿속의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공장의 현실.

키보드 대신 공장 라인.

디버그 로그 대신 진짜 불량품.


그건 낯선 영역이었습니다. 완전히. 그리고 그 낯섦은 곧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책상 앞 개발자가 아니라, 공장 라인에 들어가는 개발자

이전 직장에서의 개발은 모니터 앞, 회사 자리, 팀원 옆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버그가 나면 재현해 보고, 동료 불러서 같이 보고, 수정하고 다시 올리고, 내부 테스트하고, 빌드하고.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이 그 식으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든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설비까지 세팅된 뒤에야 본격적인 검증이 가능했습니다.


설비가 현장에 설치된다.

카메라, 조명, 렌즈, 라인 속도, 각도, 샘플 위치가 고정된다.

그 상황에서 소프트웨어가 실제로 잘 인식하는지, 원하는 불량을 걸러내는지, 허용 품질 기준에 맞게 결과를 뱉는지 점검한다.

잘못된 판정이 나오면 파라미터를 조정하고, 로직을 수정하고, 다시 테스트한다.


이건 '앉아서 수정'이 아니라 '라인 위에서 수정'이었습니다. 현장 바닥에서 노트북을 열고, 온갖 소음을 들으며, 제품이 컨베이어를 타고 지나가는 걸 보며, 실시간으로 값이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됐습니다. 이건 정말 다른 직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마지막 단계는 ‘출시’가 아니라 ‘납품’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 협력사가 모여서 하나의 자동화 설비를 고객사에 통째로 넘기는 구조였습니다. 즉, B2B였습니다. 게임은 B2C입니다.


“우리가 만든 걸 유저가 써보고 반응을 주고 떠나고 남는다.”


관계의 끝이 사용자의 취향에서 결정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달랐습니다.


“우리가 만든 걸 고객사의 라인에 얹는다. 그 라인이 1시간이라도 서면 그 회사는 실제 돈을 잃는다. 그래서 네가 실수하면 그 회사의 전체 공정이 멈출 수도 있다.”


여기에는 “다음 패치 때 고칠게요”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조금 불편해도 재미있잖아요”라는 여유도 없었습니다. 오류는 실패가 아니라 손해였습니다. 저는 그 압박을 몸으로 처음 느꼈습니다.


납품 후에 시작되는 진짜 일: 현지 디버깅

설비가 설치되고 나면 본격적인 점검이 시작됩니다. 그 점검은 종이 위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진짜 공장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라인을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입니다. 우리가 테스트를 오래 끌면 그 회사가 손해를 봅니다. 그러니 효율적으로, 빠르게, 정확하게 끝내야 하는데 상황은 늘 계획과 달라집니다.


카메라 각도가 조금 틀어지면 인식률이 떨어지고, 조명이 반사되면 좋은 샘플까지 불량으로 잡아버립니다. 해외 라인이면 기계 세팅이 국내와 다르고, 전원이 다르고, 주변 온도나 먼지 환경이 다릅니다. 조금만 달라도 결과는 미세하게 틀어집니다. 이 미세한 차이를 맞추기 위해 우리는 고객사 엔지니어들과 한 자리에서 계속 회의를 했습니다.


“이런 불량은 잡아야 한다.”

“이건 잡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의 허용 오차는 몇 퍼센트인가.”

“라인 속도는 줄일 수 있는가, 아니면 소프트웨어가 그 속도를 따라와야 하는가.”


이 대화는 단순한 기술 조율이 아니었습니다. 그 회사의 생산성 자체를 조율하는 대화였습니다. 우리말 한마디가 상대 회사의 단가를 바꾸는 상황. 그만큼 민감한 자리였습니다. 여기서 언어가 문제였습니다.


통역이 있어도, 마음은 직접 못 전해진다

주 고객사는 일본 회사였습니다. 현장 회의에는 통역이 동석했습니다. 큰 결정은 모두 통역을 거쳐서 오갔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굉장히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대화 흐름이 직선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이렇게 해서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답을 바로 듣고 대응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렇게 해서 문제가 있습니다” → 통역 →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통역 → “그 방식은 이래서 어렵습니다” → 통역..


이런 구조로 이어집니다.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리고 그만큼 누락이 생깁니다. 단어 하나가 빠지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건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와 “이건 어렵습니다”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전자는 조정 가능하다는 뜻이고, 후자는 거부의 뜻입니다. 그런데 긴 대화를 거치며 뉘앙스가 둥글게 깎여나가면 어느 순간 양쪽 모두 애매한 상태로 남습니다. 회의는 길어졌습니다. 길어지면 체력은 빠져나갔습니다.

체력이 빠지면 예민해졌습니다. 예민해지면 사소한 오해도 갈등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출장이라는 특수 조건 아래에서 반복됐습니다.


일본, 3개월씩

일본은 무비자로 3개월 체류가 가능했습니다. 그 규칙은 곧 우리 일정표가 되었습니다.


일본에 간다.

최대 3개월 머문다.

그동안 라인 세팅, 소프트웨어 조정, 테스트, 디버깅, 보고까지 모두 끝낸다.

한국으로 돌아온다.

일주일 정도 있는다.

다시 일본으로 간다.


이 패턴은 한 번으로 끝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1년 가까이 반복되었습니다. 즉, 저는 아빠이자 남편이면서도 실제 생활은 '해외 상주 엔지니어'였습니다. 집은 주민등록상 주소였고, 제 생활은 공장 옆 기숙사였습니다.


출장에는 하루 단위로 책정된 출장비가 있었습니다. 식비, 간단한 생활비 정도로 쓰라고 회사에서 지급하는 비용입니다. 저는 그 돈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아껴 먹었습니다. 싸게 해결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싸게 해결했습니다. 군것질을 줄이고, 간단한 것들로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제 머릿속 목표는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모아야 한다.”


외벌이 구조에서 이 돈은 단순한 수당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숨통이었습니다. 출장 3개월이 끝난 날, 정산이 들어오고 제 통장에 꽂힌 금액을 보면 솔직히 말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드디어 조금 숨통이 트이네.’

‘이걸로 이번 달은 버틸 수 있겠네.’

‘아내도 좀 안심하겠지.’


저는 그 순간만큼은 보상을 체감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살 수 있겠구나.”


그건 정말 실감 나는 안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통장에만 있었습니다. 집에는 없었습니다.


아이와의 관계는 숫자로 채워지지 않았다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직 세 살이었습니다. 3개월 만에 집에 딱 들어가면 그 장면은 늘 비슷했습니다. 아이의 눈이 커집니다. 순간 얼어 있습니다. 그러다 저를 인식합니다. 그리고 전력으로 달려옵니다.


“아빠!”


그 순간만큼은 정말 벅찼습니다. 그 작은 팔이 목에 감기는 느낌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 내가 집에 돌아왔구나.’

‘아빠라는 단어가 아직 남아있구나.’


그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기쁨은 아주 짧게 지나갔습니다. 그 이후 아이는 저를 다시 멀리했습니다. 같이 뭐 하고 놀아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요. 아빠와 쌓인 놀이의 히스토리가 없으니까요.


아이 입장에서는 저라는 사람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른'에 가까웠습니다. 처음엔 반가움으로 달려오고, 그다음에는 거리감이 생깁니다. 저는 그 거리감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빠는 집 밖에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아빠는 그 돈으로 우리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돈으로 아빠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그저 이렇게 느낍니다.


“아빠는 같이 안 놀았어.”


이건 아이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건 제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뼈처럼 딱딱하게 남았습니다.


관계는 멀어지고, 몸은 내려앉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같은 팀이었고, 같은 생활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우리는 서로를 누구보다 이해해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각자 버티는 방식으로 점점 멀어졌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며 24시간을 버텼습니다. 어른과 대화하지 못한 날도 많았고, 체력은 떨어지고, 정신력은 바닥으로 깎여나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가 사실상 목표가 되었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공장에서 새벽 2시에 숙소로 돌아와 쓰러지듯 눕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아침 8시에 나가서 다음날 새벽 1~2시 사이에 돌아오는 루틴. 공장에서 실제 라인 바로 옆에서 서서 디버깅하고, 다시 회의하고, 다시 수정하고. 그날의 테스트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팀장에게 매일매일 보고해야 했습니다.


저는 일본에 상주하는 책임자였기 때문에, 그 보고서는 무조건 제 몫이었습니다. 이건 체력전이었습니다.

지속적인 체력전이었습니다. 지속되는 체력전은 결국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저는 점점 무감해졌습니다.


“이건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버티면 나중에 낫겠지.”

“지금이 고비다.”


이 말들은 다짐 같지만, 실제로는 경고음을 덮는 소리였습니다.


우울은 조용하게 온다

출장지가 일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주말엔 맛집 가고, 관광도 좀 하고, 그런 재미있지 않아?”


문제는, 제가 있던 곳은 일본의 대도시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도쿄 한복판, 오사카 시내, 교토 관광지 이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공장지대 근처의 외곽 지역이었습니다. 관광지라고 부를 만한 곳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게다가 주말이면 몸이 이미 부서져 있었습니다.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나 의욕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볼까?'라는 생각이 아니라 '오늘은 일어나지 말자'라는 생각이 먼저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말마다 기숙사 방 안에서 거의 온종일 잠을 잤습니다. 자는 것 말고는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건 휴식이라기보다 생존 유지에 가까웠습니다.


기운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그냥 ‘꺼지지 않게 붙들어두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면 한 가지 감각이 몸에 스며듭니다.


고립.


말할 사람이 없고, 위로가 없고, 나를 내려놓을 만한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라는 감각이 없이 24시간을 견디는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은 서서히 힘이 빠집니다. 그 힘 빠짐은 어느 순간 이름이 붙습니다.


우울.


저는 그 우울에 점점 잠식되었습니다. 이건 슬프다는 감정과 조금 다릅니다. 슬픔은 울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우울은 표현이 사라집니다. 말을 꺼낼 힘 자체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그 우울은 어느 날 저를 한 지점으로 데려가 버렸습니다.


'그냥 끝내고 싶다'는 생각

출장을 반복하고 있던 어느 시점, 저는 일본의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7층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정말로, 아주 선명하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창문 열고 뛰어내리면 편하지 않을까.”


그 생각은 순간적으로 지나간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아주 구체적인 제안처럼 떠올랐습니다. 힘들다 → 버티기 싫다 → 그럼 이렇게 끝낼 수 있다. 이게 한 줄로 이어졌습니다. 이때의 감정은 극적인 폭발이 아니었습니다.


“으아아!” 하고 울부짖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조용했습니다. 너무 조용해서 더 위험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무서웠습니다. 정말로 무서웠습니다.


'아,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돈이 필요해서 왔고, 가족을 지키려 왔고, 버티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나를 이 끝자락까지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은 저와 아내 모두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


돈은 분명히 중요한데, 그날 이후로 질문이 달라졌다

아내도 이미 한계였습니다. 하루하루 독박 육아를 하며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너져 가고 있었고,

저는 한국에 있어도 없고 없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우리는 둘 다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지친 방식만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기존의 질문:

“어떻게든 버텨서 돈을 더 벌 수는 없을까?”


바뀐 질문:

“우리가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방식으로 벌어야 하는 돈인가?”


그전까지는 무조건 '더 버텨야 한다'였지만, 그 이후에는 처음으로 '이건 아니다'라는 감각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시점이 경고선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이 직업 선택이 저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가, 그 한계를 실제로 목격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건 '힘들다'의 영역이 아니라 '위험하다'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는 신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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