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게임 업계로 다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습니다.
'이제 일본 장기 출장 없다.'
'이제 공장 라인에서 밤새 디버깅 안 해도 된다.'
'이젠 주말마다 기숙사에 처박혀 잠만 자는 생활은 끝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C#이라는 새 언어를 익히는 것도, 유니티 엔진을 만져보는 것도, 모바일 액션 RPG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잠재된 압박이 따라왔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성과를 내야 한다.' 이건 회사가 강요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에게 채워둔 자물쇠였습니다. 새로운 회사에서 못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과 이번에는 진짜 잘해서 성공적이지 못한 처우 협상을 메꿔야 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적응의 기쁨과 동시에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해외 출장이 없으니 괜찮겠지'라는 착각
다시 게임 업계로 복귀하고 나서 가장 큰 착각이 있었죠. 그것은 '출장이 없으면 가족관계가 저절로 회복될 것이다'입니다. 겉으로 보면 말이 됩니다.
예전에는 3개월씩 집을 비웠고, 지금은 매일 집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당연히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첫째, 게임 회사도 야근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 촉박한 일정, 모바일 특유의 잦은 빌드와 수정, 라이브 전후의 긴장감. 결국 평일에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예전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둘째, 1년 넘게 떨어져 있던 시간은 단순히 ‘부재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감정이 마를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아내는 혼자 육아를 했고, 고립을 견뎠고, '내가 왜 혼자 이걸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을 겁니다.
일본에서 '그냥 여기서 끝내버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던 그 시기, 아내는 한국에서 '이 사람은 언제까지 안 올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이건 단순한 시간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의 단선이었습니다. 끊어진 선은 다시 묶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많이 착각합니다. '이제 다시 같이 사니까 자동으로 이어지겠지.'하고 말이죠. 그런데 관계는 자동 복구가 안 됩니다. 특히 ‘떨어져 있던 사이에 생긴 감정의 빚’ 은 그냥 같이 산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이렇게 들렸을 겁니다.
“해외 출장이 너무 힘들다.”
“가족과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게임 회사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습니다. 아내도 기꺼이 동의했지요.
“그래, 급여가 조금 줄더라도 당신이 좋아하는 일 하고, 우리랑 같이 있는 게 낫지.”
이건 아내가 내 편에 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이 문제였습니다. 회사는 바뀌었고, 업종도 다시 게임 업계로 바뀌었고, 출장은 이제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모습은 크게 안 바뀌었죠. 주말이면 예전처럼 그대로 쓰러져 잤습니다.
'피로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하루를 통째로 껐습니다. 몸은 이해가 됩니다. 1년 넘게 밤샘과 과부하를 버텼으니 체력 루틴이 그렇게 굳어 있었을 겁니다. 몸은 '주말 = 죽은 사람처럼 잠'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아내는 이렇게 본 겁니다.
'해외 출장이 문제라더니.. 결국 나랑 애랑 보내는 시간은 똑같이 없네? 직장을 바꾸면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겠다더니 결국 주말에도 잠만 자네? 말은 가족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실제 행동은 여전히 일이 1순위잖아.'
여기서 감정이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사람은 ‘속았다’고 느낍니다. 그게 의도적 속임이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나 지금 진짜 지쳐서 잠깐만 숨 좀 고르고..'인데, 아내 입장에서는 '또 나만 애랑 둘이네..'가 되는 구조였던 겁니다.
'만회'는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그때 모르고 있었던 '1년 넘게 떨어져 있던 걸 만회하려면 1년만 같이 산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관계는 선형이 아닙니다.
1년 떨어져 있었다고 1년 같이 사는 걸로 0이 되는 게 아닙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말리버린 감정이 다시 촉촉해지려면 ‘공유된 시간 + 대화의 깊이 + 실제 돌봄 참여’가 합쳐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의 저는 회사에서는 새 언어 익히고, 팀에서는 성과 내야 하고, 집에 오면 방전이었고, 주말은 잤습니다. 즉, 관계 회복을 위한 에너지 투입이 없었습니다.
'같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는 회복이 안 되는데 우리는 종종 그걸 놓칩니다.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더 명확합니다. 일본에 있을 때도 내가 혼자였다. 한국에 와서도 내가 혼자다. 그럼 이 사람은 ‘나라서’ 있는 게 아니라 ‘잠자려고’ 있는 거네? 그럼 나는 여전히 혼자네? 이렇게 오해가 아니라 결론으로 굳어버립니다.
결국 감정은 저장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는 이해해 줬잖아.”
“그때는 아무 말 없었잖아.”
맞습니다. 그때는 말 안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지 않았다는 게 감정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저장해 둔 겁니다.
'이 사람한테 지금 이 말하면 싸움 나겠지.'
'지금은 이직 준비하는 중이니까 내가 참아야지.'
'아이가 아직 어려서 내가 말아야지.'
'좀 있으면 나아지겠지.'
이렇게 해서 감정은 말해지지 않은 채로 쌓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것도 아닌 말에서 터집니다. 싸움이란 건 그날 하루의 사건으로 터지는 게 아닙니다. 말하지 못하고 지나간 100개의 장면이 한꺼번에 터지는 날이 있는 겁니다. 그날이 오면 대화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너는 그때도 그랬어.”
“아니 그건 그때 상황이..”
“아니야, 그때도 너는 너 생각만 했어.”
“내가 왜 너한테만 맞춰야 돼?”
“그러니까 나는 너랑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리고 마지막에 이 문장이 나옵니다.
“우리..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어디서부터였을까?
이건 꼭 부부 사이뿐만 아니라 '일 때문에 가족과 멀어진'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해외 출장이 문제라고 원인을 너무 단순화했습니다. 이건 현실 회피형 목표 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지속된 과로 + 관계 돌봄 부재 + 일 우선 사고방식이 결합된 문제였는데 그중 ‘출장’이라는 눈에 띄는 원인만 뽑아 해결하려 했습니다. 돌아오면 자동으로 회복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죠.
관계는 같이 있음이 아니라 어떻게 같이 있느냐인데 과정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내의 고통을 시간으로만 보상하려 했습니다.
'이제 집에 있으니까 됐지?'
하지만 아내가 받은 상처는 ‘시간’만이 아니라 ‘혼자였던 감정’, ‘버려진 느낌’, ‘내가 뭘 원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감정이었기에 정서적 보상이 필요했는데 그게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회복 루틴을 해외출장과 동일하게 그대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일본에서는 주말에는 하루 종일 수면으로 회복합니다. 살아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주말에 잡니다. 역시나 살아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즉, 생존 루틴이 가정 루틴과 충돌했습니다. 서로가 '이 사람은 알아줄 거야'라고 기대했지만, 우리 부부는 너무나 지쳐있어서 서로를 보듬어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둘 다 자기 쪽 피로를 ‘당연히 공유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설명과 요청을 생략했습니다. 생략은 오해를 부릅니다. 자연스럽게 부부간의 대화는 차단됩니다.
'그냥 말해서 뭐 해.'
'또 싸우겠지.'
'서로 이해 못 하잖아.'
이 단계가 오면 감정은 해결이 아니라 ‘서랍 보관’이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서랍이 열리면서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튀어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잘못은 '게임 업계로 돌아온 것'에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더 앞에 있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선택한 결정이 상대방에게도 위로가 될 거라고 당연히 생각해 버린 순간' 여기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때, 우리가 정말로 했어야 했던 말
그 시점에서 이런 말들이 실제로 오갔다면 아마 폭발 시점은 늦춰졌을 겁니다.
“당분간은 내가 주말에 많이 잘 거야. 몸이 아직 거기서 못 빠져나왔어. 근데 그게 당신이 힘들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야.”
“그래서 우리 둘이만 보내는 시간도 따로 만들고 싶어. 애 없이.”
“내가 예전에 못 했던 육아를 지금 따라잡으려면, 당신이 어떤 게 제일 힘들었는지부터 다시 설명해 줘.”
“지금 당신이 나한테 제일 서운한 게 뭔지 한 번만 정리해서 말해줄래?”
“내가 ‘이직하면 가족이랑 보낼게’라고 말해놓고 지금 못 지키고 있는 거 알아. 그 부분은 내가 사과할게.”
이런 말들은 내용을 풀어내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나는 알고 있다. 네가 혼자 고생했다는 걸.'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말입니다. 사람은 몸이 힘들다고 관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람한테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 때 관계를 포기합니다.
아내가 느낀 건 아마 이쪽에 가까웠을 겁니다. '이 사람은 일을 위해서는 몸이 부서져라 하면서 나를 위해서는 잠깐도 일찍 안 일어나네.'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 체감의 문제입니다.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의 무게
우리는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서로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는 사실 관계가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 방식으로는 못 살겠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지금처럼 '각자 버티는 구조'로는 못 살겠다.
지금처럼 '말 안 하고 참고만 있는 구조'로는 못 살겠다.
지금처럼 '회사 피로가 가정으로 그대로 흘러오는 구조'로는 못 살겠다.
이건 오히려 변경 요구입니다. '이 상태를 멈추자'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신호를 ‘이혼’이나 ‘단절’로만 읽어서 더 겁을 먹고 더 말을 안 하게 됩니다. 실은 이때가 가장 말해야 할 타이밍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다시 보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