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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트렌드를 쫓는 회사의 문제점

by 곽준원
내가 먼저 조금 바뀌었던 시기

앞선 몇 년 동안 저는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대했더라고요. 그게 나쁜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을 숨 막히게 했고, 아내와의 관계도 거기서부터 어긋났지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소울 메이트랑 토론하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해보는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숨이 트였습니다.


처음부터 전면 수용은 안 됐습니다. '그건 아니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면 일단 한 박자만 참는 식이었어요.


“그래, 네 자리에서는 그렇게 보이겠구나.”

“내가 보지 못한 맥락이 있겠구나.”


이렇게 한 줄만 덧붙이는 연습이었죠. 이렇게 생각을 조금 느슨하게 바꾸니까 집에서도 말이 좀 통하고, 회사에서도 예전만큼 부딪히지 않게 됐습니다. '아,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까지는 온 거죠. 그 무렵 회사도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PC에서 모바일로, 회사가 급하게 몸을 틀다

당시 한국 게임 시장이 그렇듯, 회사도 PC 온라인 중심에서 모바일로 빠르게 갈아타는 중이었어요. 온라인 한두 개로 버티던 시기에서, 이제는 다수의 모바일 프로젝트로 분산시키는 구조로 바뀌고 있었죠. 겉으로 보면 굉장히 공격적인 전략입니다.


'큰 거 하나'에 올인해서 한 번에 터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작은 거 여러 개'를 빠르게 만들어서 그중에서 한두 개만 터져도 전체를 먹여 살리게 하는 방식입니다. 듣기에는 합리적입니다. 리스크 분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회사는 조직을 잘게 쪼개기 시작했습니다. 10~20명짜리 모바일 스튜디오를 마구 늘렸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우와, 우리 회사 지금 엄청 투자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였습니다.


그 시절 기억에는 ‘몬스터 길들이기’가 터졌을 때, ‘도탑전기’가 올라올 때, 모바일 수집형, 캐주얼 RPG, 가벼운 성장 + 자동전투 + 뽑기 구조와 같이 시장에 한 방이 나타나면 회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거다.”

“저게 지금 먹힌다.”

“우리도 하나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 만들어야 한다”에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전부 그거 만들어야 한다.”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거의 20개에 가까운 스튜디오가 거의 비슷한 수집형/캐주얼 RPG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UI도 비슷하고, BM도 비슷하고, 전투 구조도 비슷하고, 성장선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서로 옆방에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어요. 개발자인 저로서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거.. 다 만들면 어디에다 올리지?'

'다 비슷한데 이 중에 어떤 걸 밀지?'

'이걸 전부 론칭할 수는 없을 텐데?'


조직은 많아졌는데 포트폴리오는 하나였습니다. 사이즈만 여러 개였지, 장르는 하나였습니다. 이렇듯 트렌드만 따라가는 조직에는 치명적인 한계점이 드러납니다. 이 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회사가 트렌드를 만드는 쪽이 아니라, 트렌드를 뒤에서 따라가는 쪽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PC 시장에서는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었습니다. 개발 기간이 길었고, 유통도 그렇게 급변하지 않았고,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몇 년 서비스가 가능했으니까요.


그런데 모바일은 달랐습니다. 트렌드가 반년 단위로 바뀌고, UI/UX 기준도 빠르게 올라가고, 글로벌에서 톱 라인 하나가 내려오면 국내에서 금방 따라 만들고, 그 와중에 스토어 정책도 바뀌고, 유저 취향도 아예 다른 장르로 가버리고, 이런 시장에서 ‘어? 저거 된다네? 우리도 하자’라는 태도는 거의 자살에 가까운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거 되네?”라고 말하는 그 순간 그 게임은 이미 6개월 전에 개발이 끝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행이구나’라고 인지한다. → 이미 늦음

기획 다시 짠다. → 1~2개월

프로토타입 만든다. → 1~2개월

콘텐츠 채운다. → 3~6개월

QA, 퍼블, 마케팅 들어간다. → 또 1~2개월


이렇게 돌리면 1년입니다. 그런데 모바일 트렌드는 3~6개월로 움직입니다. 즉, “따라가자”라고 했을 때 이미 시장은 다음 유행으로 넘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거의 다 만들었는데.. 이제 그 게임 안 하던데요?”

“CBT 열려고 보니 유저 관심이 옆 장르로 갔네요.”

“이대로 내도 의미가 없는데요.”


이게 한두 번이 아니고, 조직이 20개로 늘어난 상태에서 동시에 벌어지면 회사는 만들어진 건 잔뜩인데, 팔 게 없는 상태가 됩니다.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순간, 사람의 커리어도 같이 멈춘다

게임 회사에서 진짜 아픈 장면은 이때부터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정리합시다.”

“시장성이 없는 것 같아요.”

“나와 있는 비슷한 게임이 너무 많습니다.”

“일단 스톱해 두고 다른 트렌드를 찾아봅시다.”


이렇게 말하면 말은 참 깔끔합니다. 사업적인 설명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개발자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1년 동안 만든 게 없고, 포트폴리오에 쓸 게 없어지고, 론칭을 못 했고, 매출을 보여줄 수 없죠. 그럼 이직할 때 할 말이 없다.


'프로젝트를 해봤다'와 '프로젝트를 출시해 봤다'는 외부에서 볼 때는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아무리 사내에서 멋있게 만들었어도 스토어에 안 올라가면 '없는 게임'입니다.


리퀘스트 다 맞춰서 코딩했어도 서비스 안 되면 '기여도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그 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여기 더 있어도 내 경력 안 쌓인다.”

“출시하는 회사로 가야겠다.”

“이 회사는 계속 트렌드만 보네.”


그러면 회사는 또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면 또 새 팀을 만듭니다. 그 팀은 또 '지금 뜨는 게임'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또 '그거 우리도 하나 하자'라고 합니다. 이게 트렌드 추격형 조직의 악순환입니다. 시장에 뒤처지는 게 아니라, 조직이 자기 사람을 스스로 소진시키는 구조가 되는 겁니다.


우리만은 좀 달라서 다행이었다

제가 속했던 팀은 다행히 이 흐름에서 약간 비껴나 있었습니다. 우리 프로젝트는 '지금 당장 뜨는 게임을 그대로 복사하자'는 흐름보다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걸 다듬어서 내보자' 쪽이었어요. 그래서 론칭까지는 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박이 났느냐.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게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일을 잘했다고 해서 '그럼 매출은 자동으로 따라온다'가 아니잖아요.


마케팅 타이밍

동시 출시 게임

플랫폼 주목도

경쟁사 이벤트

심지어 날씨..


이런 여러 요소가 맞물려야 ‘운’이 옵니다. 제가 그때 아주 실감했습니다. '성공은 실력으로만 안 되네. 이건 진짜 운의 영역이구나.'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느꼈습니다. '저 많은 스튜디오가 다 똑같은 걸 만들고 있는데,

운까지 겹쳐야만 성공한다면.. 이 구조는 오래 못 간다.'


트렌드를 '따라갈'게 아니라 '당겨야'하는데

사실 회사가 트렌드를 따라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실패를 하기 싫어서, 윗선에 설명하기 쉬워서 '저 게임처럼 만들어라'라고 말하면 되니까. 숫자가 이미 나와 있는 걸 기준으로 삼고 싶으니까. 이건 경영진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이해되는 선택입니다.


“시장성이 검증된 걸 해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모바일처럼 시간이 짧은 시장에서는 ‘검증된 걸 한다’는 말이 곧 ‘늦게 한다’는 말이 됩니다. 트렌드를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는 늘 2등, 3등, 4등 자리에만 서 있게 됩니다. 이 자리는 싸워봤자 남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도, 사람도, 사기도 다 같이 말라버립니다.


이런 구조를 보는 동안 저도 자연스럽게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있으면, 내가 온전히 개발해 본 게임을

1년에 한 번도 내보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거였습니다. “나도 이제는 트렌드를 ‘베끼는’ 개발자가 아니라 ‘만들어보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


이 시점에서 회사는 사람을 잘 끌어당기지 못했습니다.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우리도 그 게임 하나 해보자'는 말에 설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는 조직 문제가 아니라, 방향 문제구나.”


사람들이 열심히 안 해서가 아니라 위에서 “이거 해”라고 던지는 그 ‘이거’가 계속 바뀌니까 아무도 엔딩을 못 보고 있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만들고 싶은 게임의 제안서를 써보자고 작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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