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아버지처럼은 안 살겠다”의 역설
일본에서 1년을 떨어져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게 있었습니다. '아이가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른다'였습니다. 아이가 어색해하더라고요. 아빠를 반가워하는 건 맞는데, '이 사람하고는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랑 대화 안 하고 크더니 결국 똑같은 패턴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있구나라는 것을요. 아버지와 상호작용을 많이 한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규칙을 배우잖아요.
어른에게는 이렇게 말하는구나.
이렇게 장난치면 여기까지는 허용이고 그 이상은 안 되는구나.
거절당해도 관계가 끊어지는 건 아니구나.
그런데 저는 그걸 못 배우고 성인이 됐고, 그 공백을 회사에서, 동료에게서, 인간관계에서 뒤늦게 주워 담았거든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런 다짐을 했었습니다.
'이 패턴은 내 세대에서 끝내야지. 나는 내 아들하고는 꼭 친하게 지낸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다는 겁니다. '친한 아빠가 되겠다'는 마음은 있는데, '친한 아빠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인가' 질문이 오면 말문이 막혔어요. 아버지에게 배운 모델이 없으니까요.
“무슨 교육을 또 받아”에서 “이거였구나”로
그때 아내가 유치원에서 하는 부모 교육에 다녀오더니 그러더군요.
“아빠 교육도 있대. 한 번 들어봐.”
처음엔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뻔한 얘기겠지. 사랑하세요, 칭찬하세요, TV 줄이세요. 회사에서도 잔소리 듣는데 집에서까지 교육을 받아야 하나?'
그래도 유치원에서 하는 거니 너무 무시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갔습니다. 그런데 강사님의 질문이 제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동안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아이를 보면 “사랑해”라고 말한다.
맛있는 걸 사준다.
필요한 걸 사준다.
학원도 보내준다.
그럼 사랑한 거다.
그런데 강사님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랑은 주체가 ‘준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대상이 깊이 느껴야 비로소 사랑입니다.”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멈췄습니다. 나는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아이는 그걸 느꼈을까?라는 질문의 대답은 '아니요'였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과 아이가 느끼는 사랑이 같은 크기일까?'라는 질문에도 확신이 안 섰습니다. 그게 저를 멈추게 했어요.
“공격성은 나쁜 게 아닙니다”라는 말
그 교육이 그냥 말로 끝났으면 아마 마음에 오래 안 남았을 겁니다. 근데 이어서 아주 흥미로운 걸 하더군요.
이름도 재밌었습니다.
“피터팬과 후크 선장” 놀이였습니다. 그 놀이를 해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강사님이 이런 설명을 했어요. “아이에게는 공격성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격성은 남을 때리는 폭력이 아니라 ‘나는 지금 부당해요’라고 말할 줄 아는 힘입니다.” 이건 되게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 특히 아빠한테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강한 존재 앞에서는 말하면 안 된다’로 배우거든요. 아빠는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두껍고, “아빠가 하지 말랬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아이 입장에서는 절대 권력이에요.
근데 이렇게 크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나중에 커서도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강사님이 이런 구조를 짠 겁니다.
아이들은 피터팬이 되고,
아빠들은 후크선장이 된다.
아이가 아빠를 이기도록 설계한다.
“강한 존재도 내가 이길 수 있구나”를 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게 단순한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빠를 이겼다'라는 경험은 아이 마음속에서 ‘아빠=항상 나보다 위’라는 공식을 조금씩 약하게 만들거든요. 그래야 나중에 자기 의견도 말합니다.
그 한 번으로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곧 고등학생이 되는 아이는 저희 부부에게 자신이 느낀 감정을 잘 표현합니다. 자신이 새롭게 산 옷을 입어보며 어떠냐고 묻기도 하고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저에게 "아빠. 반응 좀 해줘!"라며 자신이 느낀 바를 충분히 전달합니다.
“부대장 후크 8명 뽑습니다”
아이와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라면 저는 그 어떤 것이라도 잡고 싶었습니다. 일본 출장으로 1년을 비웠다는 죄책감이 있었고, '나는 좋은 아빠가 돼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부대장 후크 8명 뽑습니다”라고 하니까 생각도 안 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네. 합니다. 저 할게요.”
그때 제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왕 하는 거 티 나게 하자'
우리 아들한테 '우리 아빠는 이렇게까지 해준다'는 걸 보여주자.
집에 와서도 “오늘 아빠 멋있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아빠가 되자.
사실 아이들 앞에서 몸으로 놀아주는 아빠가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아빠는 애들 눈에 정말 히어로처럼 보입니다.
“와 우리 아빠가 후크야!”
이 말 한마디가 사실 아이에겐 세계관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장난감 칼, 똥침, 그리고 드디어 깔깔 웃는 아이
행사는 정말 단순했습니다. 아빠들은 후크선장이 되고, 아이들은 장난감 칼을 들고 와서 후크의 급소(=똥침)를 가격(!)하는 구조였죠.
평소 같으면 “야야야 그거 하면 안 돼”라고 말했을 행동을 이번만큼은 “좋아! 더 세게!”라고 말해줬습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이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평소에 막으면 안 되는 걸 오늘은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 수준으로 허용해 줍니다. 이때 아이는 이런 경험을 합니다.
'아, 내가 이렇게 세게 해도 아빠는 나를 혼내지 않는구나.'
이건 공격성에 대한 아주 건강한 학습입니다. 내가 내 감정을 강하게 표현해도 관계가 부서지지 않는다는 학습. 행사가 끝나고 집에 가는데 표정이 딱 달라져 있더라고요.
'이제는 아빠하고 이렇게 놀아도 되겠구나.'
이게 얼굴에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매일 퇴근하면 이런 루틴이 생겼습니다. 아이가 장난감 칼 두 자루를 들고 달려옵니다. 하나는 “아빠 거”, 하나는 “내 거”. 거실에서 방으로, 방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다시 거실로 “피터팬! 후크!”를 반복 제가 4~5번 똥침을 맞고, “아악! 후크 사망!” 하고 쓰러지면 아이가 “아니야! 아직 안 죽었어!” 하고 다시 살려냅니다.
이 장면이 진짜 좋았습니다. 이때는 회사도 없고, 개발도 없고, 사내 정치도 없고, 그냥 아들과 함께 있었거든요. 저는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아들은 그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보였나 봅니다. 아이 표정이 그때는 정말 '아빠를 제대로 만났다'는 표정이었습니다.
111 법칙 – 듣기에는 단순하지만 해보면 어렵다
그 교육에서 한 가지를 더 배웠습니다. 이름도 간단했어요. 111 법칙. 1초, 1분 1시간이라는 아이와 유대감을 갖기에 매우 강력한 법칙입니다.
1초.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면 1초 안에 반응하기.
“어 잠깐만” 이게 아니라 “어 왜?” 하고 먼저 눈을 맞추는 겁니다. 이걸 꾸준히 하면 아이 머릿속에는 '나는 불러도 되는 사람이다'가 심어집니다.
1분.
아무리 바빠도 1분은 무조건 아이 눈높이에서 들어주기. 이 1분 동안은 잔소리, 가르침, 교훈 금지입니다. 그냥 “아 그래서?”, “진짜?”, “그다음엔?” 하고 들어주는 겁니다.
출근하고 "아빠"하며 달려오는 아이에게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겁니다. 아이는 1분이 지나면 보통 자신의 말을 거의 다 끝냅니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아빠가 퇴근해서 옷도 갈아입고, 세수도 좀 하고 싶은데. 잠깐 해도 될까?"라고 묻는 겁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아빠의 쉼을 허락해 줍니다.
1시간.
주말에 1시간은 아이가 하자는 놀이를 무조건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빠가 생각한 좋은 놀이'가 아닙니다. 무조건 '아이가 하고 싶은 놀이'입니다. 그게 칼싸움이든, 자동차 굴리기든, 공룡 이름 외우기든, 쓸데없어 보이는 유튜브 주제든. 그 시간만큼은 아이가 연출가, 아빠는 출연자입니다.
이 법칙을 저는 3년 동안 지켰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피곤할 때도 많았습니다. 퇴근해서 밥 먹고 소파에 앉으면 그냥 멍하니 있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근데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면 1초 안에 “어?” 하고 대답하는 걸 3년을 하면 아이 시선에서 아빠는 이렇게 보입니다.
“내가 부르면 오는 사람.”
“내가 하자고 하면 해주는 사람.”
“내가 싫다고 말해도 떠나지 않는 사람.”
그렇게 저는 '친한 아빠'가 됐습니다. 사실 대단한 기술을 쓴 게 아닙니다. 대단한 장난감도, 대단한 여행도, 비싼 데 놀러 간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시간과 반응을 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비싼 거였어요.
“사랑은 그 대상이 느껴야 사랑이다”
돌아보면 이렇습니다.
“아빠가 사랑해” → 말
“아빠가 퇴근하자마자 네 칼 받아줬어” → 행동
“아빠가 네 얘기 1분 동안 아무 말 안 하고 들었어” → 관계
“아빠는 네가 날 찔러도 웃었어” → 안전감
이 네 개가 합쳐져야 아이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아, 나 아빠한테 사랑받는다.”
그러니까 사랑은 주는 사람이 “사랑해”라고 말한 시점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나 사랑받네”라고 느낀 시점에 완성되는 거였습니다.
이걸 저는 회사도 다니고, 코드도 짜고, 야근도 하고, 그 와중에 겨우겨우 배웠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이기도 했지만, 가장 잘 보낸 애착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애착은 아이에게만 유익함이 아닙니다. 저의 마음도 회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