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떨어졌으니 1년이면 되겠지'라는 단순함
일본에서 1년을 떨어져 지냈을 때 저는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1 했으니까 +1 하면 0이지.”
“1년 비웠으니까 1년만 다시 열심히 함께 있으면 예전처럼 돌아가겠지.”
개발자 머리로 보면 이게 딱 맞잖아요. 빠진 만큼 다시 채우면 되고, 꺼진 만큼 다시 켜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이렇게 안 되더라고요. 부모교육에서 강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떨어져 있었던 시간의 8배가 회복 시간입니다.”
과학 논문에서 본 것도 아니고, 통계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말이 너무 몸으로 이해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떨어져 있는 동안 부모는 '보고 싶다' 하나만 깊어지는데, 아이 쪽에서는 '이 사람 없이도 충분히 살아지네'가 조금씩 자리 잡거든요.
부모는 그 시간을 '결핍'으로 보내고, 아이는 그 시간을 '적응'으로 보냅니다. 그러니까 다시 가까워지려면 부모가 그 적응을 부드럽게 다시 '의존'으로 돌려줘야 합니다. 그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냥 믿기로 했습니다. 1년 떨어져 있었으니까 8년은 붙어 있는 마음으로 가자.
111법칙을 ‘빡세게’ 했던 이유
앞 화에서 말한 111법칙(1초 반응, 1분 경청, 1시간 놀이)을 저는 생각보다 엄격하게 했습니다. “아이가 부를 때 1초 안에 대답해 주면 아이는 ‘나는 부르면 오는 사람을 가진 존재’라고 느낍니다.” 이 말이 너무 좋았거든요. 처음 2년은 진짜 거의 군대식으로 했습니다.
“아빠!” 하면 “어!”
씻고 있어도 “어 잠깐만”이 아니라 “왜–?” 하고 먼저 눈을 맞춰주고, 아무리 바빠도 아이가 말할 때는 1분은 꼭 들어주고 주말에는 '아빠가 준비한 활동'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거'로 1시간. 이걸 2년 하니까 아이와의 관계가 눈에 띄게 바뀌었습니다.
저를 '집에 있는 어른'이 아니라 '부르면 반응하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거든요. 그다음 6년은 강도는 좀 낮췄지만 끊지는 않았습니다. 이게 중요하더라고요. 아이 관계는 '가끔 크게'보다 '매일 조금씩'이 훨씬 세게 박힙니다.
캐리비안 베이로 떠난 부자(父子) 원정
그 8년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날이 하나 있어요. 아들과 단둘이 캐리비안 베이에 갔던 날입니다. 사실 저한테는 꽤 큰 도전이었습니다.
아침 7시 기상.
캐리비안 베이 9시에 도착.
하루 종일 물놀이.
아들은 체력 무한.
아빠는 이미 오전 11시에 첫 피로.
짐 챙기기, 밥 챙기기.
물놀이 끝나고 아이 씻기고 옷 입히기.
엄마까지 있으면 배분이 되는데 둘이서 가면 아빠는 풀타임 담당자가 되거든요. 그래도 갔습니다. “하루면 되잖아. 이 하루가 기억에 남으면 되잖아.” 이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저녁 7시쯤 집에 오니까 저는 진짜 체력이 바닥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차 안에서 30분 자고 일어나더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게 또 애들이죠. 아내가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수고했어요. 이제부터는 제가 볼게요.”
그 한마디가 그렇게 고맙더라고요. 몸은 힘들었는데 '오늘 하루는 아빠가 나만 봐줬다'는 기억이 아들 마음에 찍혔다는 건 알겠더라고요. 이런 날이 1년에 한 번씩만 있어도 아이는 그걸 묶어서 기억합니다. “아빠랑 나갔던 날들” 이라고요.
대화가 많아질수록 거리가 줄어든다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는 건 놀아준 시간 때문에만 생기지 않았어요. 말을 나눌 수 있게 된 게 더 컸습니다. 예전에는 이랬어요.
“학교 어땠어?”
“그냥.”
이게 끝입니다.
아빠와 1년을 떨어져 지내면 이게 기본 모드가 됩니다. 보고는 싶은데, '아빠랑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라는 회로가 안 만들어져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거꾸로 갔습니다.
“아빠는 말이지, 옛날에…”
“아빠도 초등학교 때는…”
“아빠도 회사에서 이런 일 있었어.”
제 이야기를 먼저 풀었습니다. 아이가 경험이 부족하면 부모가 먼저 '이렇게 떠드는 게 대화야'를 보여줘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아이가 슬쩍슬쩍 자기 얘기를 끼웁니다.
“나도 오늘 그런 일 있었어.”
“오늘 학교에서 애가 이렇게 했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어.”
이게 나오는 순간 아빠-아들 관계가 '생활비 대주는 사람 vs 양육받는 사람'에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 vs 들어주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걸 8년 했으니 지금은 어디를 같이 가도 어색하지 않게 된 거죠.
왜 8년이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8년은 ‘빚을 갚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신뢰를 다시 쌓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이거예요.
아빠가 한동안 없었다.
근데 다시 나타났다.
근데 또 안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믿지 말고 보자.
어? 1년이 지나도 계속 오네?
2년이 지나도 부르면 대답하네?
3년째도 주말에는 나랑 놀아주네?
아, 이 사람은 이제는 안 떠나는 사람이구나.
이 확신을 얻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건 1초인데 '이 사람은 진짜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매일 조금씩 쌓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렇게 믿습니다.
떨어져 있던 시간 = 물리 시간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 심리 시간
심리 시간은 물리 시간보다 항상 길다
지금은 어떤가
8년을 이렇게 보냈더니 지금은 아들이랑 어디를 가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밥 먹으러 가도 말이 이어지고, 걸어가도 침묵이 불편하지 않고, 내가 “오늘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면 “그럼 아빠는 이렇게 하면 되잖아”라고 자기 의견도 내고, 가끔은 제가 한참 얘기하다가 “너도 이제 많이 컸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예전 같았으면 “일본에서 1년 떨어져 있어서 좀 서먹해요”라고 말했을 텐데 지금은 그 말을 굳이 꺼낼 필요가 없어졌어요. 이제는 현재가 과거를 덮을 만큼 쌓였거든요.
사춘기로 힘든 순간을 보낸 아이지만, 씩씩하게도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물론 말이 한동안 없었던 적도 있습니다. 가끔 서로의 말이 상처가 되어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시 이야기하는 날에는 아이의 말에 경청하며, 아이의 입장에서 최대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