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보면 시대가 보인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예전 세대와 제일 다른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나 기분 나빠”라고 말하고, 억울하면 “이건 억울해”라고 말하고, 서운하면 “나 속상해”라고 말하죠. 어른 입장에서 보면 가끔 이렇게 느껴집니다.
“어휴… 우리 때는 저렇게까지 말 안 했는데.”
“저렇게 다 말해도 되는 건가?”
그런데 이건 버릇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문화 전체가 감정 표현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90년대까지의 양육은 ‘참아라’, ‘조용히 해라’, ‘부모 말이 먼저다’가 규범이었다면, 지금은 유치원부터 이미 “감정 이름 붙이기”, “기분 말하기”, “싫다고 말해도 돼”가 교육 안에 들어가 있어요. 이게 중요한 이유는, 아이들은 우리가 못 배운 걸 배우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아이는 '밖에서는 의젓하다'는 말을 듣는데, 집에 오면 감정을 아주 과감하게 표현합니다. 이게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입니다. 안전하니까요. 애착이 단단할수록 집에서 감정이 더 나옵니다.
즉, “밖에서는 얌전해요”는 사실 “밖에서는 아직도 존중을 시험 중이에요”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집에서만 저렇게 해요”는 “집이 제일 안전해요”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여기서 부모가 배울 첫 번째 포인트가 생깁니다. 아이들은 지금 허용된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고, 부모는 이전 시대의 언어로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왜 저렇게 직선적으로 말하지?”라는 생각이 들지요. 이 간극을 메우는 과정이 곧 부모의 성장입니다.
회복탄력성: 아이는 금방 일어났는데 나는 왜 며칠을 끌까
아이는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방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와서 다시 일상을 이어갑니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부르는데, 핵심은 '스트레스를 안 받는 사람'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은 사람'을 말합니다.
아이는 기분이 상하면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다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곧바로 하죠. 그런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부당함, 다양한 관계에서 받았던 상처를 늦은 밤까지 생각합니다. 당연하게도 자기 전까지 생각납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또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아이는 정서 경험이 짧고 분절적이고, 어른은 정서 경험이 길고 해석이 달라붙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때 싫었음'으로 끝나지만, 어른은 '그때 싫었음 →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 나를 무시한 걸까 → 내가 약해 보였나 → 다음에 뭘 해야 하지'로 생각이 길어집니다. 여기에 과거 경험까지 붙으면 더 길어지죠. 여기서 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아주 직선적인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기분 안 좋을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너 전체는 아니야.”
아이는 그걸 몸으로 보여줍니다. '화났다'와 '너 싫다'를 구분할 줄 아는 거죠. 근데 저는 그걸 잘 못했습니다. 화나면 관계도 같이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런 태도를 매일 곁에서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내가 회복탄력성이 없는 게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고, 옆에서 이런 모델을 못 봐서였구나.”
이 지점에서 부모는 첫 번째 성장이 발생합니다. 아이의 회복법을 관찰해서 내 정서 회복에도 적용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화내고 끝낸다'
'한 시간 방전하고 다시 나온다'
이런 작고 빠른 회복 루틴이 가능해집니다.
'적절하게 표현한다'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저는 의사 표현을 숨기지 않고 적절하게 한다는 그 행동 자체가 도전인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게 정확히 세대 간 사회화의 차이점이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자란 세대는 “표현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표현하지 않으면 의사 없는 사람”으로 배웁니다.
'집에서는 자기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데, 밖에서는 의젓한' 아이는 사실 굉장히 건강합니다. 프로이트도 그랬고, 융도 그랬고, 현대 애착이론도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안전기지가 있는 아이는 바깥에서 버틴 뒤 집에 와서 풀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점에 부모가 이렇게 생각해 버리면 흐름이 끊깁니다.
“너 밖에서는 착하다며, 왜 집에서는 이래?”
“어디서 이렇게 버릇없이 말하는 걸 배웠어?”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아, 여기서는 감정 풀면 안 되네' 하고 다시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러면 밖에서 했던 그 의젓함이 가면이 돼 버립니다. 반대로 이렇게 말해주면 완전 달라집니다.
“밖에서 힘들었구나. 그래서 집에서 푸는구나.”
“집에서는 이렇게 말해도 돼.”
이렇게 말하는 부모를 곁에서 오래 보면 부모도 자기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한테서 부모도 배우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더디게 크는 이유
여기서 잠깐 철학 얘기를 하나만 섞어볼게요.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상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요) 요지는 '인간은 항상 누군가와 관계 맺으면서 자란다'라는 겁니다. 관계가 멈추면 성장이 멈춥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다 컸다. 애만 크면 된다.”
그래서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죠.
“오늘 학교에서 XX가 내 물건을…”
“그럴 수도 있지. 네가 양보해.”
여기서 부모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해석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부모가 이렇게 말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때 너는 뭐라고 말했어?”
“그 말하고 나니까 네 기분은 어땠어?”
“다음에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이건 단순히 아이한테 기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부모가 대화의 깊이를 키우는 연습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 때문에 부모의 언어가 풍부해지는 겁니다. 심리학에서 이걸 조망수용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에서 멈추지 않고 '저 사람(=아이) 눈에는 지금 이게 이렇게 보이는구나'까지 가는 능력이죠. 이 능력이 높아질수록 인간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아이와의 갈등도 짧아집니다.
아이는 작은 스승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기도 합니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과 '이제 안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두 번째가 되는 순간부터 관계는 고집이 됩니다. 아이와 소통하면 부모가 성장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아이는 매일 변한다.
그 아이와 대화를 하려면 나도 매일 업데이트해야 한다.
그 업데이트가 곧 나의 성장이다.
예를 들어 이런 대화를 해볼 수 있습니다.
“요즘 애들이랑 있을 때 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뭐야?”
“어떤 친구가 멋있어 보여?”
“선생님이 어떤 말해줄 때 네가 ‘와 이 선생님 좋다’라고 느껴?”
이 질문들을 들으면 부모는 생각합니다. ‘아.. 지금 아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예의나 성적이 아니라 존중, 공정, 선택권이구나.’ 이걸 알게 되면 나도 내 상사, 내 부모, 내 동료를 대할 때 조금 다르게 말하게 됩니다. 아이에게서 배운 걸 어른관계에 적용하는 거죠. 이게 부모가 성장하는 두 번째 루트입니다.
나는 아직도 손윗사람이 어렵다
저는 손윗 남자 어른과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 몰라서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른과의 상호작용이 부족하면 사실 손윗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할지 그 문법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신기하게도 내가 못 배운 걸 아이한테는 가르치고 싶어 집니다.
“너는 싫다고 말해도 돼.”
“너는 부당하다고 말해도 돼.”
“너는 친구한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해도 돼.”
라고 말하는 순간.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옵니다. '근데 나는 왜 상사에게 그 말을 못 하지?' 바로 이 지점이 부모의 성장 포인트입니다. 아이한테 말해준 말을 나에게도 적용하는 순간이 오거든요.
'나도 저 사람 말투는 불편하다고 말해도 되지 않나?'
'나도 회사에서 이건 감당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아이는 부모가 못한 말을 하면서 자랍니다. 부모는 아이가 하는 말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말하고 싶었다'는 과거의 나를 만납니다. 그래서 아이와의 소통이 결국 내 어린 시절을 복구하는 과정이 되는 겁니다.
저는 8년 동안 아이와 거리를 줄이는 작업을 꾸준히 했습니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부모에게 한 가지 변화는 반드시 생깁니다.
“이제는 급하게 안 고치려고 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왜 그렇게 삐뚤게 말해!”, “그건 무례한 거야!”, 하고 곧바로 바로잡으려 했다면, 이제는 “어휴.. 지금은 저렇게 말할 나이구나.”, “저걸 저렇게 날 것 그대로 말해주는 게 고맙네.” 이렇게 한 박자 미뤄서 보게 됩니다.
이건 심리학에서 정서적 여유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같은 행동을 보더라도 '당장 바꿔야 한다'에서 '지켜보고 다음에 얘기하자'로 옮겨간 거니까요.
그런데 이 여유는 아이와 대화를 꾸준히 한 부모에게만 생깁니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아이 행동이 항상 돌발상황으로 보이거든요. “쟤는 왜 저래?”가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