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테이블이 생겼다
우리 집에는 1000피스 직소퍼즐, 브루마블, 할리갈리, 인생게임 같은 보드게임이 잔뜩 있었어요. 그건 단순히 '뭔가 많이 사둔 집'이어서가 아니라, 함께 뭔가를 한다는 걸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가 불러도 잘 안 앉으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드게임을 꺼내면 “오늘은 뭐 해?” 하면서 슬금슬금 옵니다. 아마도 아이 마음속에서는 '이건 혼 나는 자리가 아니라 노는 자리'라는 구분이 아주 명확히 있었겠지요.
보드게임의 좋은 점은 시작과 끝이 가시적이라는 겁니다. 공부는 “좀 더 해라”가 쉬운데, 게임은 룰이 끝나는 순간이 명확하니까 갈등이 적어요. 어른과 아이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고요.
특히 부모가 핸디캡을 줄 수도 있고, 줄였다가 다시 안 줄 수도 있는 구조라 아이에게 감정을 가르치기 참 좋은 도구가 됩니다.
“항상 이길 수는 없어”를 몸으로 배우게 하고 싶었다
아내는 아이와 단둘이 게임을 하더라도 크게 승부욕이 없어서 아이에게 자주 졌습니다. 사실 아내가 보인 행동은 가족관계에서 진짜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네가 이겼어"를 쉽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아이가 관계에서 안전감을 느끼거든요. 그런데 그 상태만으로는 한 가지가 비어 있습니다.
“그럼 나는 질 때는 어떻게 하지?”라는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패배를 경험하게 주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이기도록 봐주고, 흐름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면 다시 조절하고, 또 어떤 날은 진짜로 이겨버려서 아이가 울어보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정서의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교육입니다.
아이들이 무너지는 포인트가 대체로 이거잖아요.
'늘 하던 대로 했는데 오늘은 안 됐다.'
'항상 이겼는데 오늘은 졌다.'
'엄마는 여러 번 봐주는데 아빠는 왜 안 봐주지?'
이때 울어보고, 투덜거려 보고, 조금 삐쳐보고,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아빠 한 판 더 하자”라고 말해보는 경험은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지만 회복탄력성의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탄력성은 거창한 위기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 '작은 실패 이후에 다시 시도해 본 경험의 누적'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부모가 해줘야 하는 건 사실 별 게 없습니다. 그냥 기다려줘야 합니다.
울 때 “그만 울어!”라고 하지 않고, 기분이 나쁜 상태를 잘 버티도록 옆에서 시간만 벌어준 것. 이게 아이한테는 '감정이 와도 이 집에서는 버틸 수 있구나'라는 신호가 됩니다.
놀이가 가진 인문학적 힘
여기서 잠깐 인문학을 한 숟갈 얹어볼까요. 요한 하위징아(J. Huizinga)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존재’라고 불렀잖아요. 이 사람의 핵심 주장은 이겁니다.
“놀이는 곁가지가 아니라 문화의 원형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 남으니까 놀자”라고 하지만, 역사는 거꾸로 흘렀습니다. 사람들이 놀다 보니 규칙이 생기고, 규칙이 생기다 보니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생기니 공동체가 만들어진 겁니다. 보드게임은 이걸 아주 축소판으로 보여줘요.
먼저 규칙이 있다. (룰 북)
그다음 참여자가 있다. (가족)
그다음 승패가 생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감정 처리가 따라온다.
이 순서가 중요한데요. 우리 세대가 어릴 때는 이 순서가 자주 뒤바뀌었습니다. 감정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규칙이 끼어들었어요. “울지 마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어른한테는 그러는 거 아니다.” 감정을 누르고 그 위에 규칙을 덮는 식이었죠.
그런데 저희 집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고 거꾸로 갔습니다. 먼저 게임이라는 규칙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 안에서는 감정을 표현해도 된다. 졌을 때 슬퍼해도 된다. 이겼을 때 너무 좋아해도 된다. 단, 판이 끝나면 다 끝이다. 이 구조가 건강합니다.
놀이가 갖고 있는 기본 철학을 잘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놀이의 세계에서는 감정이 '다 해도 되는' 공간이니까요. 이걸 전문 용어로는 '제한된 자유'라고도 부릅니다. 완전히 자유도 아니고, 완전히 통제도 아닌 상태. 아이는 여기서 사회를 미리 연습해 봅니다.
패배를 견디는 힘: 실패 내성
보드게임을 가족이랑 할 때 꼭 필요한 심리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실패 내성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졌다'는 사실을 감당하는 근육입니다. 이 근육이 약한 아이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나 안 해.”
“재미없어.”
“너는 원래 잘하잖아.”
이 말들의 진짜 뜻은 '난 지는 게 싫어'입니다. 그런데 이걸 너무 일찍 꺾어버리면 "그럼 네가 이기는 게임만 하자"로 가버리고, 그러면 아이는 도전 영역으로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와 함께하는 놀이에서 균형을 잡아줘야 합니다. 초반에는 이기게 해 주고, 어느 정도 재미가 충분히 축적되면 이번에는 진짜로 졌을 때 감정을 맛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냥 옆에서 기다려줍니다.
이게 왜 좋으냐면 '패배 → 좌절 → 회복 → 다시 참여'라는 사이클을 몸에 새겨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중학생, 고등학생이 돼서 시험을 망쳤다든가, 친구와 갈등이 생겼다든가, 게임에서 연패했다든가, 할 때 그대로 나옵니다.
성인은 보통 이렇게 생각하죠. “그때 한 판 진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말입니다. 근데 아이 입장에서는 그 한 판이 자기 효능감 초기치를 만드는 순간입니다.
'내가 못해서 졌다 → 그래도 아빠가 나 버리지 않았다 → 그럼 다음 판도 해도 된다.' 이 신뢰가 쌓이면 사춘기 때도 '부모는 나 안 버린다'는 기본선이 생깁니다.
직소퍼즐이라는 조용한 협력
저희 집에는 보드게임 외에도 1000피스 직소퍼즐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보드게임은 경쟁의 언어였다면 1000피스 퍼즐은 협력의 언어였습니다. 퍼즐이 좋은 이유는 조급함으로는 절대 안 되고, 강요로는 더더욱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가 하고 있으니까 너도 와서 꼭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죠.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저희 부부가 먼저 천천히 맞추고 있으면 아이가 왔다가 갔다가 하다가 어느 순간 조각 하나를 “여기다!” 하고 끼웁니다. 그게 아이에게는 엄청난 보상입니다.
“내가 끼운 한 조각이 전체 그림에 포함됐다.”
“나는 사소한 존재가 아니구나.”
“이 집에서는 내가 낀 것도 남는다.”
이건 위니콧의 ‘함께 있는 경험’하고도 비슷합니다. 굳이 말 안 해도 같이 뭔가를 하고 있는 상태. 말로 가르치지 않아도 옆에서 속도를 보여주는 상태. 아이 입장에서는 이런 시간이 '나는 이 집 사람이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 됩니다.
사춘기가 와도 버틸 수 있는 이유
아들은 이제 사춘기를 조금씩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함께 보냈던 추억을 생각해 보면 잘 이겨내리라 생각합니다. 그냥 낙관이 아니라 근거 있는 신뢰입니다. 사춘기 때 아이가 부모에게 하는 말은 날카롭습니다.
“몰라요.”
“귀찮아요.”
“됐다니까요.”
“왜 나만 그래요.”
그런데 이런 말 뒤에는 항상 이런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나는 이 집에서는 진짜 감정 말해도 된다.' 어릴 때 보드게임에서 울어도 봤고, 퍼즐 하다 말고 가도 됐고, 게임에서 졌을 때 한동안 입 꾹 다물고 있어도 아빠가 옆에서 기다려주는 경험을 했으니까 사춘기가 와도 다시 돌아올 자리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부모가 기억해야 하는 게 하나 있어요. 사춘기는 부모와의 애착을 부정하는 시기가 아니라 어릴 때 만들어진 애착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 장난감 칼 들고 “후크 사망!”하던 그 기억, 브루마블에서 세금 잘못 계산해서 울던 그 기억, 할리갈리에서 한 손 늦게 얹어놓고 억울해하던 그 기억이 다 애착의 재료였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조금 말이 거칠어지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고 해서 그 시절이 무효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미 그 시절이 방탄복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부모가 얻은 것
이 보드게임과 퍼즐의 시간에서 아이가 배운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부모도 몇 가지를 배웁니다.
아이의 감정은 생각보다 빨리 회복된다.
→ 그러니 내가 너무 길게 혼자 끌 필요가 없다.
이겨주기만 하는 건 교육이 아니다.
→ 아이에게 버틸 수 있는 좌절을 주는 것도 사랑이다.
놀이 안에서는 강요하지 않아도 참여가 온다.
→ 집에서의 리더십도 이렇게 해도 된다.
경쟁과 협력을 번갈아 경험한 아이는 관계를 부드럽게 다룬다.
→ 그러니 사춘기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 이건 '아이와 놀아줬다'는 기록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규칙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규칙은 게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에요.
“이 집에서는 져도 된다”
“이 집에서는 화내도 된다”
“이 집에서는 다시 해달라고 말해도 된다.”
이 룰이 생긴 겁니다.
보드게임이라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이 모여 주사위 던지고, 말 한 칸씩 옮기는 일일 뿐이니까요. 그런데 그 테이블 위에서 벌어졌던 일은 꽤 큽니다.
아이는 패배를 배웠고, 부모는 기다림을 배웠고, 가족은 '우리'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철학자 가다머가 대화를 두고 이런 말을 했어요.
“대화는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게 아니라 둘 다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가족 보드게임이 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이는 감정을 조절하는 쪽으로 조금, 부모는 통제를 내려놓는 쪽으로 조금. 그렇게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 사춘기라는 파도도 '이것도 지나갈 거야'라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거겠지요.
사춘기는 나쁜 게 아닙니다. 나쁜 사춘기는 없고, 방치된 사춘기만 있을 뿐입니다. 어릴 때 테이블 위에 쌓아놓은 시간만 있으면 그 파도는 대체로 잘 넘어갑니다. 이미 이 집에는 '졌다가도 다시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