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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글쓰기 교육은 게임 콘텐츠로 한다.

by 곽준원

아이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을 때였습니다.


“게임만 하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이 게임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글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


그때 아이는 마인크래프트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두고, 잠깐 간식을 먹는 척하다가 곧바로 컴퓨터 앞으로 가곤 했습니다. 어느새 화면 속 세상에는 아이가 만든 집과 농장, 이상한 기계 장치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책을 읽고 블로그에 서평을 열심히 쓰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때였지요. 책을 덮고 노트북을 닫을 때마다 문득 아이 쪽으로 시선이 옮겨갔습니다.


'저 열정의 일부라도 글쓰기로 옮겨올 수 없을까?' 아이에게 글을 쓰자고 정면으로 이야기하면 반발이 심할 게 뻔했습니다.


“게임 그만하고 공부해.”


이 말이 가진 파괴력은 이미 수많은 부모들이 실험을 통해 증명했지요. 그래서 저는 방향을 조금 틀어 보기로 했습니다. 게임을 멈추라는 대신, 게임을 글쓰기의 재료로 쓰기로 한 것입니다. 어느 날, 아이가 마인크래프트 속에서 뭔가 복잡한 구조물을 만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옆에 슬쩍 앉아 묻었습니다.


“이건 뭐 만드는 거야?”

“이거? 지옥문이야.”

“지옥문? 그건 어떻게 만드는 건데?”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흑요석 몇 개가 필요하고, 이렇게 세우고, 여기를 불로 탁 켜면 포탈이 열려.”


흥분한 아이의 손가락은 공중에서 사각형과 직사각형을 그리며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설명을 그냥 말로만 하고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제안을 꺼냈습니다.


“있잖아. 네가 인터넷에서 모르는 걸 검색해 보면 항상 누군가가 설명해 주잖아? 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자기가 아는 걸 글로 써준 거야. 너도 마인크래프트 설명을 글로 써서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돼보면 어때?”


아이의 반응은 예상대로였습니다.


“싫어.. 귀찮아..”


그렇습니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귀찮은 일입니다. 특히 아이에게 글쓰기는 숙제와 거의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생각해야 하고, 상상해야 하고, 묘사해야 하고, 문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이 힘든 작업을 조금 더 가깝게 끌어오려면, 아이의 가장 친숙한 세계인 게임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을요.


마인크래프트의 세계는 생각보다 체계적입니다. 어떤 아이템을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한 재료가 있고, 몬스터마다 약점과 패턴이 다르고, 특정 구조물을 만들려면 블록의 위치와 순서를 정확히 맞춰야 합니다.


지옥문을 예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흑요석 몇 개, 어떤 모양, 어느 위치에 설치해야 하는지 머릿속에 구조가 잡혀 있어야 실제로 구현이 가능합니다. 이건 곧 훌륭한 설명의 재료입니다. 저는 그 점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걸 글쓰기 교육의 재료로 써보자.'

먼저 저는 마인크래프트에서 설명할 수 있는 주제들을 쭉 리스트로 뽑았습니다.


지옥문 만드는 법

다이아몬드 캐는 방법

몬스터별 특징과 대처법

초보자를 위한 생존 첫날 가이드

시스템 명령어


이런 식으로, 게임 공략 사이트에서 볼 법한 제목들을 아이와 함께 정리했습니다. 다음 단계는 직접 플레이하며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네가 평소 하던 대로 게임을 하는 거야. 대신, 오늘은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스크린숏을 찍어보는 거야. 그리고 이걸 나중에 큰 스케치북에 단계별로 정리해 보자.”


아이의 표정에는 여전히 귀찮음이 가득했지만, 마인크래프트를 ‘한다’는 말에 일단 거부감은 조금 줄어든 듯했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허들은 언제나 같습니다.


첫 문장. 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도, 서평의 첫 줄을 쓰기까지 시간을 한참 보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스케치북을 앞에 두고 연필을 잡았을 때,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자마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렇지, 바로 이 지점에서 포기하고 싶은 거지.’

아이의 손은 공중에서 몇 번이나 맴돌았습니다.


“뭐라고 써?”

그 순간 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목은 아빠가 좀 도와줄게. 예를 들면 이런 거 어때? <마인크래프트 지옥문 만드는 법> 그리고 첫 문장은, 그냥 이렇게 시작해 봐. ‘지옥문은 마인크래프트에서 지옥으로 가기 위한 포탈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 한 줄만 써보자.”


아이의 연필이 종이 위에 겨우 첫 문장을 긋는 것을 보면서, 저는 제 안에서도 묘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나도 매번 이 지점을 넘기 위해 이렇게 애쓰는데..’ 아이의 고통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겨우 첫 문장을 썼을 때, 저는 감탄했습니다.


“와, 진짜 이게 제일 힘든 거야. 아빠도 글 쓸 때 첫 문장이 제일 안 나와. 너 지금 제일 어려운 걸 해낸 거야.”


그 말을 듣고 아이는 살짝 웃었습니다. 자기만 힘든 줄 알았는데, 매일 글을 쓰는 아빠도 똑같이 힘들어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신기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첫 문장을 넘기고 나자, 아이의 손이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흑요석을 ○개 모아요.”

“이렇게 네모 모양으로 세워야 합니다.”

“맨 위에 두 개를 더 올리면 문 모양이 됩니다.”


문장은 여전히 서툴렀지만, 내용은 꽤 정확했습니다. 마치 머릿속에 있는 게임 화면을 글과 그림으로 옮겨 적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중간중간 물었습니다.


“이 부분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써볼까?”

“여기서 초보자가 실수하는 포인트는 뭐야?”


그러면 아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자기가 겪었던 실수들을 떠올리며 덧붙였습니다.


“흑요석 말고 돌로 하면 안 돼요.”

“한 칸이라도 크기가 다르면 포탈이 안 켜져요.”


이렇게 쓰고 나니, 단순 설명을 넘어 초보자를 위한 팁까지 들어간 작은 공략 글이 되었습니다. 물론 과정이 항상 매끄럽지만은 않았습니다.


“아, 힘들어.”

“이 정도면 쓴 거 아니야?”


중간중간 아이는 여러 번 연필을 내려놓으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아이에게 쓰기를 강요하기보다,

먼저 감정을 인정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 힘들지. 아빠도 글 써보면 중간에 진짜 때려치우고 싶어. 근데 신기하게도, 딱 여기 조금만 더 버티면

그다음부터는 생각보다 빨리 끝나더라.”


그리고 글을 끝까지 마무리했을 때는 반드시 말해주려고 했습니다.


“와, 진짜 대단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썼네. 이거 아무나 못 하는 거야. 수고했어.”


아이의 눈빛이 잠깐 반짝이는 걸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글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어려운 일을 끝까지 해냈다는 성취감이 아이의 어깨를 살짝 펴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게임과 글쓰기를 함께 엮어서 진행한 시간이 얼마나 큰 교육적 효과를 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에게 글쓰기가 완전히 즐거운 일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글쓰기는 아이에게 여전히 '신경 써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이런 경험이 남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가지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쓸 수 있구나.’, ‘글을 쓰는 일은 힘들지만, 첫 줄을 넘기면 생각보다 할 수 있구나.’


그리고 ‘아빠도 글쓰기 힘들어하면서도 매일 쓰는 사람이구나.’ 이 기억들이 나중에 아이가 다시 글을 써야 하는 순간에 떠올라 조금은 덜 두려운 마음으로 첫 문장을 적게 해주지 않을까, 저는 그 가능성을 믿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이 시기에 저는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동시에, 다시 한번 저 자신에게도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활용한 글쓰기 교육은 어쩌면 대단한 교육법이라기보다, 아이와 함께 같은 세계를 바라보며 단 한 줄을 쓰게 만드는 과정을 함께 겪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순간들이 쌓여 아이에게는 작은 자신감이, 저에게는 부모로서의 조심스러운 뿌듯함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혼자 마인크래프트를 하다가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고, 그걸 또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글을 쓰게 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분야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게 될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출발선 위에 이때의 작은 경험이 조용히 놓여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웃음이 납니다.


“글쓰기 교육은 게임 콘텐츠로 한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문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지금도 꽤 마음에 드는 교육 실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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