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진심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식상하게 쓰이지만, 여전히 플래너에 진심입니다. 첫 번째 도구인 책을 소개하면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제 가장 오래된 습관은 플래너 쓰기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사서 3학년때부터 본격적으로 적기 시작했으니 거의 인생의 절반 이상을 플래너와 함께 해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참 다양한 플래너를 사용했어요. 여전히 사용 중인 프랭클린 플래너부터 윈키아 플래너, 오롬, PDS, 몰스킨 등 다양한 브랜드의 다이어리와 노트도 여전히 수집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플래너에 집착했을까요?
수집의 시작은 있어 보임에서부터. 대학생 때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룸메이트가 들고 온 검은색의 플래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매일 적어도 영원히 남을듯한 벽돌책 두께의 속지도 함께요. 좋아 보이거나 부러운 것은 그저 마음으로 단념하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직접 사서 사용해 봐야 그 마음이 사라져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2주 정도를 고민하다가 교보문고에서 룸메이트와 똑같은 플래너 겉지와 속지를 샀습니다. 가격도 5만 원이 훌쩍 넘어갔습니다. 지금도 플래너나 다이어리를 5만 원 넘게 주고 산다고 하면 고민할 텐데요. 20년 전 그 당시에 고민도 안 하고 샀습니다. 나름 미래를 보는 투자 안목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여전히 우연이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어주길 바라지만, 행동 없이는 그 우연도 그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일 뿐. 나름 큰돈을 주고 산 플래너를 처음에는 수학의 정석처럼 활용했습니다. 앞부분만 조금 때가 타고 뒷부분은 아주 깨끗하게 새것인 상태로 보관하였죠. 한 3년 정도를요.
지금도 예전에 쓴 플래너 속지들을 연도별로 잘 보관하고 있는데요. 깨끗한 만큼 소중했던 그 시절의 기억도 함께 날아갔습니다. 단 한 문장, 한 단어만 적어두었어도 그 시절의 나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을 텐데 그걸 연결할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여전히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매년 새로운 플래너와 속지를 수집했다는 것이죠. 잘 쓰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수집하면서 조금씩 쓰는 행동이 자연스레 따라왔어요. 처음에는 그저 물속에 있었는데, 조금씩 걸어보고 잠수도 해보고 손을 저으면서 조금씩 배워가는 것처럼 말이죠. 나중에는 코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플래너 쓰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가지실 분들이 있겠죠. 또는 ‘나는 메모를 싫어해. 나는 태어날 때부터 P성향이 강한 사람이야.’라고 말을 하실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요. 플래너는 J인 사람들이 유난히 더 잘 쓰고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도구가 아니에요. P인 사람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용해야만 하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도구입니다. 처음에는 체계적으로 적으려고 하지 마세요. 시작은 항상 힘을 빼야 합니다. 이걸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죠. 저도 여전히 힘을 빼려고 노력 중입니다.
플래너는 계획을 세우기 위함도 있겠지만, 그저 나의 하루하루의 조각들을 조금씩 담아간다는 생각으로 적습니다. 그렇게 적다가 주변 사람들의 추억들도 함께 담아주면 더 좋겠죠? 일단은 내가 평생을 수집할 플래너부터 찾는 겁니다. 작은 노트부터 두꺼운 플래너까지. 뭐든 좋습니다. 그리고 뭐든 적어주세요. 10년 후 또는 20년 후의 나를 생각하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