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8.XX 약품, 폭파하고 싶다
내가 맡은 제품과 나를 분리해 내는 법
내가 마케터로 처음 맡은 제품은, 엄청나게 매력적인 제품은 아니었다.
이미 특허가 만료되어 시장에는 제네릭 제품만 60개가 넘게 나와 있었고, 출시된 지 20년이 된 약이었다.
하지만, 매년 600억 원의 sales를 기록하는 block buster였고, (한 tablet에 600원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sales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네릭이 60개 가까이 나와 있지만, 여전히 시장에서 60% 의 시장점유율은 지키고 있는 제품이었다.
PM으로 어떻게 시장을 지켜낼 것인지, 쏟아지는 경쟁품과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고, 잘해도 딱히 빛을 볼 일도 없지만 못 하면 (회사 매출에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큰 관계로) 욕먹기 좋았다.
그러던 와중에, 회장님의 이름이 너무나 독특한 것으로 유명한 국내 제약회사 X에서 내가 맡은 제품의 개량신약을 출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맡았던 약이 4mg의 용량이 표준 용량이고 증상에 따라 8mg까지 두 알로 증량할 수 있게 되었다면, X는 아예 한 알에 8mg짜리 제품을 출시했다.
이 글에서 X 회사의 개량신약 출시가 우리 회사 매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자세히 논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두절미하고, 나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X회사는 영업 마케팅 비용에 큰돈을 쓸 수 있는 회사였고, 적용받는 규제가 외국계 제약회사는 다르기 때문에 판촉 활동도 내가 다니는 회사보다 훨씬 유연했다.
공격적인 영업 마케팅으로 제품의 매출이 출렁였다. 매 달, 아니 매주 실적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몽촌토성역 근처에 X회사의 본사가 있는데, 그곳을 차로 지나갈 때면, 혼자
"저 건물을 폭파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모든 나의 스트레스의 근원이 그 회사로부터 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 나 앞이 안 보여....."라고 말하고 주저앉았다.
별안간 날벼락같은 딸의 비명에 달려온 엄마가 나를 바닥에 눕혔다.
1~2분 안정을 찾자 다시 앞이 보였다.
아마도 미주신경성 실신이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날로 살기 위해서, 나와 PM으로써 담당하는 내 제품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내가 맡은 제품 = 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매일매일 한 순간도 생각을 멈추지 못했고, 원하던 마케팅에 와서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앞서
내 제품이 잘 되면, 내가 잘 되는 것 같았고, 내 제품이 고전하고 있으면 내가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조바심이 나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어렵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 어려웠으며, 종종 거리며 스스로를 불안의 구덩이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단기적인 목표와 이를 달성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나=내 성적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공식이었다. 사회생활도 학창 시절처럼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훨씬 긴 호흡에 내가 control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나는 꾸준히, 오래,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법을 배워보지 않은 것 같다.
나라는 존재를 분리해 내고, 조금 더 차가운 마음으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기 시작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조금은 색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걸 실현할 기운과 용기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