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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Sep 09. 2020

이제 그만 크고 무거운 갓은 내려놓읍시다

(1) 남들의 시선을 대하는 자세 : 선비 vs 마이웨이

그렇게 상처뿐이었던 제주도 여행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차이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언어화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렸을 때 문제아였던 동생은 원하는 삶을 그려가고 있고, 모범생이었던 언니는 뒤늦게 방황하는 아이러니함. 나는 이 아이러니한 방황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그 차이에 대해 알아야 했다.



체면이 중요했던 꼬마 선비



우리 집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캠코더 영상이 하나 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90년대 중반, 소니 캠코더로 찍은 영상이다. 내가 6살, 동생이 4살 즈음, 우리가 동네 놀이터에서 나란히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을 엄마가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영상 속에서 동생은 갑자기 멀쩡히 타고 있던 자기 그네를 놔두고 내 그네를 탐내기 시작한다. 급기야 동생은 자기 그네에서 내려와 내 얼굴을 쥐어뜯으며 나보고 그네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한다. 무슨 심보인지 똑같은 그네인데 아마 내 그네가 더 좋아 보였나 보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엄마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보지만, 엄마는 나를 구해주지 않고 계속 그 모습을 촬영하면서 화면 밖에서 박장대소하고 있을 뿐이다. (내심 동생이 내 그네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하니 우리 엄마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나는 동생을 때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밀쳐내지도 않는다. 다만 그네에 매달려 몸을 최대한 뒤로 빼고선 내 얼굴을 쥐어뜯어대는 동생의 손을 간신히 피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몇 분 간의 피 말리는 사투 끝에 나는 결국 힘없이 그네에서 내려오고 만다. 그 항복의 몸짓은 지금 봐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곧이어 동생은 얄밉게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그네를 쟁취해낸다.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때 얘기를 하며 ‘모범피가 정말 착한 아이였지’라고 입을 모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그때 그네에서 내려온 이유는 착한 아이여서가 아니었다. ‘체면’ 때문이었다. 비록 6살이었지만 난 그날을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동생이 매서운 기세로 내 얼굴을 쥐어뜯자 놀이터에 있던 많은 아주머니들이 ‘어머 어머, 쟤네 좀 봐.’하면서 우릴 흥미롭게 지켜봤던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 절대 착해서 그네를 양보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선 동생과 치고받고 참 많이도 싸웠다.


대표적인 사건이 또 있다. 초등학교 때, 학급에 인원이 많아 잠시 학교에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오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시간표를 착각하고 오전에 학교를 가게 된 것이다.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야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곧장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학교를 간다고 방금 나간 아이가 다시 아파트 입구로 들어오는 것을 베란다에서 우연히 본 엄마는 6층에서 창문을 열고 “모범피야. 왜 벌써 와?”라고 소리쳐 물었다. 고작 8살이었던 나는 엄마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들어가서 얘기할게.



굳이 시간표를 착각한 것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크게 외치기 싫었던 것이다. 우리 엄마는 이 사건을 두고 아직까지도 나를 ‘선비’라고 놀린다.


그렇게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꼬마 선비는 그대로 점점 어른 선비가 되어갔다. 내가 실제로 마음이 끌리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하고 멋진 것들을 추구했다. 가끔은 화려하고 빛나는 것들이라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전에 경험 삼아 지원해본 IT 회사에서 인턴을 하다가 운 좋게 정규직으로 전환이 됐다. 당시 내 오랜 꿈은 방송 PD 였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그냥 IT 회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나의 오래된 회피 성향과 나 자신에 대한 확신 없음이 큰 역할을 한 탓도 있지만, 그 회사가 ‘대기업’이라는 점과 ‘그 회사에 합격했는데 왜 안가?’라는 주변 반응 또한 크게 한몫했다. 물론 지독한 취업난 속에서 ‘대학 졸업 전 입사 확정’이라는 수식어도 어른 선비의 체면을 세워주기에 충분했고 말이다.


입사하고 나서도 친한 동료들에게 ‘넌 왜 그렇게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봐?’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야? 난 할 말은 하는 타입인데?’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들의 눈에는 아마 다 보였던 것 같다. 어딜 가나 예쁨 받고 싶어 하는 습성, 어딜 가나 잘하고 싶어 하는 습성을 말이다. 그렇게 지독한 모범생 병에 걸려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내 모습을 그들은 많이 안타까워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훈련된 눈치와 센스 덕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쁨은 받았지만, 나의 기준이 아닌 남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길임을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누가 뭐래도 난

내 갈 길을 간다



반면 동생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체면 신경 쓰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달려드는 타입이었다. 어릴 적 내 그네를 막무가내로 빼앗을 때처럼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손님이 오셨을 때 부모님이 내놓은 딸기 한 접시를 동생이 10분 만에 전부 집어 먹어버린 것 또한 우리 집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화다. 일찍부터 그녀의 마이웨이는 시작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동생은 본인에게 필요한 과목 빼고는 늘 수업시간에 엎드려서 당당히 잠을 청하는 아이였다. 선생님들에게 ‘문제아’로 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선생님들이 잠을 잔다고 꾸중을 하면 ‘이건 나한테 필요 없는데 왜 해야 돼요?’라고 오히려 따져 묻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학교 수업 시간에는 잠을 자고, 그 체력으로 밤에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영악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 KokomoCole, 출처 Pixabay


수업 태도의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동생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신경 썼고 남의 시선 따위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효율’을 추구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성적이 좋았던 것이 더 선생님들을 화나게 하는 포인트였을 것이다. 선생님들과 갈등이 잦아지자 동생은 ‘그렇게 불만이시면 전학 갈게요!’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그 말은 낙장불입이 되어 실제로 고3 때 전학을 가기도 했다.


또 동생은 대학교 때, 단체 활동과 선배들의 학과 행사 참여 요구를 모두 완강히 거부했다. 지금이야 개인주의가 존중받는 분위기지만, 당시만 해도 선배들의 ‘똥 군기’ 문화가 유행이었는데, 동생은 남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기준대로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미움을 받는다거나 사람을 잃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 때는 내가 대학 방송국에서 무려 ‘국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후배들에게 똥 군기를 잡고 있던 시절과 같다...)


무엇보다 동생이 대학 졸업  ‘백수타이틀을 다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나와 가장  차이점이었다. 친척들은 동생이 미술 대학을 나와놓고도 백수가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명절 때마다 ‘그럴 거면 미술학원 선생님을 해라등의 폭언에 가까운 충고를 서슴지 않았다.  말이 폭력적인 이유는 미술 학원이 나빠서가 아니라 동생이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생은 어딘가에 빨리 취업하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탐색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히 따랐다. 동생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보다,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훨씬 중요한 아이였던 것이다.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이다. 사회의 평판이나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의지를 버리면 삶의 존엄성도 잃어버린다. 스스로 설계한 삶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 일을 적어도 남들만큼은 잘할 준비를 하라.



단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삶의 기준을 오롯이 ‘나’에게 두고, 스스로 삶을 설계해 나가는 것이 조금 더 행복한 길이 아닐까. 이제 그만 이 크고 무거운 갓을 벗을 때가 된 것 같다.



* 커버 출처 : 키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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