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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8. 2020

그래도 낭만이 흥건한 삶을 살래

불안이라는 파도를 계속 넘어야 할 이유

OO 결혼식, 토요일 12시


백수도 어김없이 청첩장을 받는다. 홈 화면에 떠있는 캘린더 위젯을 보고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쉬는 일이 잦아졌다. 평일 낮의 여유로움 같은 백수생활의 실체 없는 로망이 옅어지고 나면, 마치 재난문자 같이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는 불안을 마주하게 된다.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청첩장을 받을 때나, 주변 사람들의 이직이나 출산 소식을 들을 때가 그렇다. 나를 뺀 모두가 인생의 다음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만 같다.


회사 동기들이 대화방에서 주식이나 부동산 관련 정보를 나누는 것을 보아도 한 없이 착잡해진다. 돈을 불리기는커녕 피땀 흘려 모아 놓은 적금을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언제까지 이대로 버틸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있는 내 처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정도 더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다가, 너무 놀라 황급히 머리 위로 떠오른 말풍선들을 쓱싹쓱싹 지워버리기 일쑤다.


수입이 없어도 통장의 돈은 잘도 빠져나간다. 숨만 쉬어도, 고작 이 정도 생활을 영위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든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참으로 쓸데없이 편리한 세상이다. 대출이자와 핸드폰 요금과 교통비와 가스비와 앱 구독료 등이 빠져나가는 것을 한 달에 한 번 잊지도 않고 꼬박꼬박 문자로 안내해준다. 가끔 실수로라도 요금 청구를 빼먹을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새삼 놀랍다. 어쩌면 나는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자동이체 문자 덕분에 그나마 현실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치과를 포함한 병원비가 한 번에 100만 원 넘게 깨지기도 했다. 부모님은 둘째치고 내 몸 하나 건사하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을 옛날엔 왜 몰랐을까. 아무래도 지출이라는 것은 예상 범위를 훨씬 벗어나라고 있는 것인가 보다. 한 달에 한 번 들어오는 월급이 생활에 얼마나 큰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이제야 실제로 체감할 수 있게 됐다.



코로나 19 확산 방지에 동참하기 위해
O일 O일까지 휴관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백수로 살아가는 일은 또 어떤가. 큰 맘먹고 등록한 글쓰기 수업도 한참을 쉬었고, 얼마 전에는 <퓰리쳐상 사진전>을 보러 예술의 전당 입구까지 갔다가 갑작스러운 전시 휴관 공고를 확인하고 헛걸음을 한 적도 있다. 백수가 되어 시간은 남아도는데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뉴스에서는 연일 멀쩡하던 직장을 갑자기 잃은 사람들의 소식을 전했고, 동네 여기저기에 '이번 주까지만 영업하고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이용해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와 같은 서글픈 현수막이 내걸렸다. 모두가 밥벌이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넌 뭘 믿고 그렇게 낭만이 흥건하냐?'라고 묻는 영화 속의 대사를 속으로 수백 번도 더 되뇔 수밖에 없다.


© doto, 출처 Unsplash


어쩌면 백수는 밀려오는 불안의 파도를 계속 넘으면서 버티는 서퍼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너무 큰 불안이 밀려와서 물속으로 처박히기도 하고, 때로는 넘실대는 불안 위에서 잠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 그런 서퍼 말이다. 유난히 파도가 큰 날이 있거나 잔잔한 날이 있을 뿐이지, 파도가 아예 밀려오지 않는 날은 결코 없다. 그러니 백수생활의 가장 큰 덕목은 밀려오는 불안함을 다독이면서 매일을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파도를 넘고 있는 이유는, 이전과 달리 조금은 마음에 드는 내 모습 때문이다. 매일 무표정으로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억지로 견디고, 퇴근 후에는 고칼로리 음식과 술로 공허함을 달래던 내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예전과 달리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장바구니에 할인 상품들만을 골라 담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가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달리고 싶으면 달릴 수 있는 삶의 방향키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실감한다. ‘이게 아닌데’를 외치면서 흘러가는 삶에 속수무책 끌려가지 않고, 일단 멈춰서 어떻게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내 용기가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괴로운 일이니까 말이다.


놀랍게도 한정된 잔고와 무한히 늘어난 시간을 갖게 되면 삶의 우선순위가 명료해진다. 책임과 의무가 사라진 상황에서 내가 어느 곳에 시간과 돈을 쓰는지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 나는 꾸미는 것보다는 읽는 것에, 먹는 것보다는 배우는 데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운동은 빼먹더라도 매일 조금씩 읽고 쓰는 사람이며, 문장을 깎고 다듬으면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외모와 운동, 유흥에 집착했는데, 그것들은 쳇바퀴 같은 삶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뿐, 나의 진실된 욕망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불필요한 껍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서른이 넘은 이제야 여린 속살의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그 어떤 간섭도 없던 때의 당신의 기본값은, 어떤 모양이었는가?' 김이나 작사가의 <보통의 언어들>이라는 책에서 여러 번 밑줄 그어둔 문장이다. 혹시 당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당신의 원래 모양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시간을 꼭 가졌으면 좋겠다. 넘실대는 불안을 즐기는 서퍼의 삶은 생각보다 꽤 견딜만하다. 누군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라고 비웃는다 해도, 나는 차라리 낭만이 흥건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커버 출처 : 영화 <족구왕> 네이버 블로그 @firstsputn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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