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람 Oct 29. 2020

중요한 걸 알면 굳이 바쁠 필요 없잖아

충만한 한 가지가 애매한 열 가지보다 나으니까


내 백수 생활 중 유일한 사치는 6,8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이다. 이 고가의 아메리카노는 우리 동네에 위치한 한 애견카페 겸 유치원에서 판매 중인데, 동생과 나는 매주 화요일 오전,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아메리카노에 6,800원을 할애한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 사정이 많이 안 좋으시죠."


주기적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우리에게 어느 날 사장님이 건네신 인사말이다. 평일 낮, 화장기 없이 편안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코로나 때문에 실직한 백수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서 우린 '네 그렇죠'하며 하하하 웃어넘긴다. 동생과 나는 너무 자주 와서 이미 외워버린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대며, 오늘은 누가 왔는지 웃으며 여쭈어본다.


백수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20년을 함께한 내 소중한 동생이자 반려견을 잃었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 와서 그 아이의 모습을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저마다 생김새도 성격도 모두 다르지만,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담은 눈망울만큼은 놀랍도록 비슷하니까 말이다. 나는 20년을 함께한 아이에게 못다 준 사랑을, 출근한 가족을 기다리며 이곳에 맡겨진 아이들에게 베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빠글하거나 빳빳하거나 보드라운 털을 한없이 쓰다듬고 놀아주다 보면 어느새 두 시간 정도는 훌쩍 지나있다.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옆에 와서 몸을 부대끼고,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을 주는 아이들을 보면 늘 마음이 뭉근하게 데워지고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한테서 느끼는 사랑과는 완전히 또 다른 종류의 것이다.


아이들과 교감하다 보면 어느새 백수생활 중 조금은 지쳐있던 내 마음도 빠르게 회복이 된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내 입에서는 '아 진짜 행복하다.'는 말이 새어 나온다. 그것도 아주 여러 번. 분명히 작년까지는 '아 진짜 죽고 싶다.'를 외쳤던 것 같은데,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 스스로도 참 놀라울 뿐이다.





행복해지는 데는 과연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 걸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6,800원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깨닫는데 참 멀리 돌아왔던 것 같다. 소확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멈추어가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았고, 충만한 한두 가지가 애매한 열 가지 것들보다 낫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다.


주말에 침대에만 누워있는 게 죄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다. 꼭 어디 좋은 곳에라도 가거나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도 아니면 내 인생이 정말 별 거 없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바쁘게 지냈다. 주말에 재밌는 이벤트는 없는지, 어디 가볼만한 곳은 없는지, 누구 만날 사람은 없는지 늘 찾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늘 목말라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실제 갈증이 아니라 삶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지독한 몸부림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크게 끌리지 않는다.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들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자유롭게 글 쓰기, 좋은 곳에 가서 음악을 듣고 내가 틀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틀기, 가까운 소수의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기,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가끔씩 고개를 들어 변화하는 하늘의 색 지켜보기 그리고 애견 카페에 와서 시간 보내기 그 정도면 족한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행복해지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 앞으로 인생을 설계할 때 '돈'은 좀 뒤로 미뤄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멈춤의 시간을 보내면서 내 인생을 통째로 어떤 채에 넣고 탈탈 털어낸 느낌을 받았다. 불필요한 것들이 걸러져 나가고 아주 중요한 것만 남은 느낌이 든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에 뭔가를 더 채우고 싶은 갈증은 늘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거나 벌컥벌컥 들이켜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동생과 매주 한 번씩만 이 곳에 오자고 약속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아니면 매일 6,800원짜리 사치를 부리며 이 곳에 죽치고 앉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늘 아쉬운 발걸음을 떼며 이 곳을 나선다.


안녕 다음 주에 보자, 친구들아.
행복을 나눠줘서 고마워.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천사 같은 내 친구들은 항상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내 까만 옷에는 아이들의 하얀 털이 잔뜩 붙어있었다.





이전 22화 그래도 낭만이 흥건한 삶을 살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