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여름다워야 여름이다
나는 여름을 좋아했었다. 과거형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전 여름은 초등학교 4-5학년 때이다. 그때 내가 살았던 집은 아파트에서 소위 ‘풍골’이라 불리는 위잉윙 소리를 내는 바람 길이 나있는 동이었다. 더운 여름 낮에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가방끈을 쥔 손에도 땀이 베어 나올 때, 풍골은 그 어떤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부터 반쯤 벗은 신발 안엔 땀에 잠겨 축축해진 양말, 반바지, 반팔을 현관에서부터 순서대로 바닥에 척척 벗으며 화장실로 직행하곤, 수도꼭지를 맨 오른쪽으로 틀어 찬물로 발부터 다리, 어깨, 머리로 올라가며 샤워하는 게 좋았다. 냉장고에서 타파통을 꺼내어 엄마가 깍뚝 썰어두신 수박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먹으면 차갑고 달콤한 과즙으로부터 장속까지 저릿하고 시원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엔 태양 볕에 눈이 부셔 잠을 깰 만큼 오후 늦게까지 자다일어나 매미울음소리와 거실 티비소리가 공존하는 소란스런 여름 낮이 좋았다. 주말엔 아빠랑 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러 나가, 너무 달려 목구멍에서 피맛이 느껴질 때쯤, 셋이 나무그늘에 앉아 엄마 몰래 쭈쭈바를 사먹고, 입에 묻은 초코를 슥슥 닦아주는 아빠의 짭짤한 티셔츠의 맛까지 모두 좋았던 여름 이였다. 텐트와 캠핑코펠세트만을 챙겨 가족끼리 떠난 계곡 여행은 달그락, 솨악- 소리와 바위의 미끈한 이끼까지 매년 모든 것이 똑같아도, 또 매년 새로운 재미였다. 개학을 앞두곤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동생과 책상에 나란히 앉아, 날짜와 날씨만 쭉 적어둔 일기장에 밀린 일기를 지어내다가, 이내 선풍기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아~ 소리를 내며 장난치던 여름밤이 좋았다.
‘잊고 살았는데 나, 여름 좋아했구나!’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조금 더 커서부턴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싫어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중학생인 나는 교복 안에서 주르륵 흐르는 땀줄기의 생성 과정이 낱낱이 느껴짐이 싫었다. 고등학생인 나는 6월 모의고사가 끝나고 이른 하굣길에 조그만 그늘조차 허용되지 않는 횡단보도에서 타죽는 개미를 공감할 것만 같았다. 어른인 나는 주차된 차에 올라탈 때 세상의 모든 열을 삼킨 듯 뜨겁다 못해 내 엉덩이를 바싹 구워버릴 것만 같은 차량시트까지 싫었던 계절이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우스갯소리로 아무 말을 써놓고 끝에 “…여름이었다.”만 붙이면 그럴싸한 글이 된다는 일종의 밈을 알게 되었다.
땀방울, 방울들이 맺히다, 맺히다 등골을 따라 함께 모여 줄기를 이룬다 …여름이었다.
나무그늘이 감추기엔 어느 곳도 소외 하지 않으려는 큰 태양 볕이 내리쬔다 …여름이었다.
모든 엉덩이들을 까맣게 태워 버릴 것만 같은 카시트 …여름이었다. ㅋㅋ
정말이지 어떤 문장 뒤에 있더라도 청량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마법의 문장 “…여름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여름은 그대로인데, 그게 여름이고, 그래야만 하는데 내가 변했다. 여름을 보는 나의 시선이 변했다. 어느새 부터 여름이 가을이길 원하고, 봄이길 원했다. 여름은 여름다워야 여름이다. 그게 여름이었다. 나는 이제 다시금 여름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
나의 생각과 시선이 바뀐 그 시간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