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출혈 없는 수술실, 그 안에서 깨어나는 로봇들
1987년 영화 이너스페이스(Innerspace)는 한 세대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작아진 잠수정이 인체 내부를 탐험하는 장면은 허무맹랑한 SF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미래의 가능성을 그려냈다. 그 상상은 이제 현실의 청사진이 되려 하고 있다. 알약 속 수많은 마이크로 로봇들이 몸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시대. 출혈도, 절개도, 흉터도 없는 수술이 가능해지는 미래 말이다.
이 글은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 지금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나노로봇'의 현황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외과 수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따라가 본다.
'나노로봇'이라고 하면, 우리는 무심코 금속 재질의 미니 로봇을 떠올린다. 프로펠러, 로봇팔, 센서가 달린 기계적 상상. 하지만 오늘날 의학에서 활약하는 나노로봇은 이런 형태가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DNA, 지질, 단백질 등 생체 물질로 구성된 '기능성 분자', 혹은 '분자 구조체'에 가깝다.
이 '분자 로봇'들은 센서 대신 주변의 화학반응을 감지하고, 모터 대신 생화학적 자극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마치 자물쇠에 딱 맞는 열쇠가 들어와야만 열리는 것처럼, 특정 단백질이나 pH 조건을 만나야만 작동한다. 외형은 단순하지만 기능은 정교하다. 이들은 크기가 너무 작아서 세포보다도 작고, 생체 적합성이 뛰어나며, 임무 후 체내에서 분해될 수 있도록 설계된다.
DNA는 단순한 유전정보 저장소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DNA의 상보적 결합 원리를 이용해 '종이접기(오리가미)'처럼 특정 형태로 접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기술은 긴 DNA 가닥을 기본 뼈대로 하고, 수십~수백 개의 짧은 DNA '스테이플' 가닥으로 원하는 2D 혹은 3D 구조를 형성한다.
의료 분야에서는 이것을 일종의 '스마트 폭탄'으로 사용한다. DNA로 만든 작은 상자 구조 내부에 항암제 같은 약물을 싣고, 표면에는 암세포에서만 나타나는 단백질을 인식하는 리간드를 부착한다. 정상 세포 옆을 지나칠 때는 열리지 않다가, 목표 암세포를 만나면 상자 뚜껑이 열리며 약물을 방출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암세포 주변의 산성 환경을 감지해 열리는 설계도 가능해졌고, 국내 KIST는 이 원리를 응용해 'DoriVac'이라는 DNA 기반 면역 백신을 개발했다. DNA 구조체 표면에 면역 자극 물질을 일정 간격으로 배열함으로써, 기존 면역 치료보다 더 강력하고 정밀한 면역 반응을 유도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mRNA 백신의 성공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기술이 바로 LNP다. 이 기술은 세포막과 유사한 성질을 가진 '지질 방울' 속에 약물이나 유전물질(mRNA, siRNA 등)을 넣고, 그것이 세포 안으로 흡수되도록 유도한다.
LNP는 체내에서 불안정한 mRNA를 보호하고, 세포막과 융합하여 그 내용물을 세포 내부에 안전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항체나 특정 펩타이드를 LNP 표면에 부착하여 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도달하게 만드는 타겟팅 기술도 병행되고 있다.
응용은 다양하다. 약물뿐 아니라 조영제도 넣어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수행'하는 테라노스틱스(theranostics)에도 활용되며, 항암제들을 혼합해 '칵테일 요법'을 하나의 나노입자에 구현하는 방식도 실험되고 있다. LNP는 물리적 수술이 어려운 장기(뇌, 눈, 심장 등)에 약물을 보내는 방법으로도 주목받는다.
'기계형 나노로봇'에 가까운 현재 기술 중 하나는 자기장을 활용한 마이크로봇이다. 수백 나노~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자성 입자를 포함한 구조체를 체내에 주입하고, 외부에서 자기장을 가해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원리다.
대표 응용 분야는 혈전 제거. 혈관에 약물을 탑재한 마이크로봇을 주입한 뒤, 자기장으로 막힌 혈관까지 정밀하게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약물을 방출하거나, 회전 운동을 통해 물리적으로 혈전을 제거할 수 있다. 국내 DGIST와 KIMIRO 연구진이 동물 실험에서 이 방식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자기 유도 마이크로봇의 장점은 '조작 가능성'이다. 다른 나노입자들이 수동적으로 환경에 반응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외부 자극을 받아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제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응급 치료 등 정밀성을 요구하는 상황에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혁신적인 방식이 바로 박테리아를 활용한 하이브리드 로봇이다. 일부 박테리아는 편모를 회전시켜 체내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박테리아의 추진 능력과 '암세포 지향성(homing)'을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암세포 주변의 저산소 환경을 선호하는 박테리아를 선택하고, 그 박테리아 표면에 약물 나노입자를 부착하면, 외부 조작 없이도 해당 부위로 자율 이동하는 '자연 유도형 약물 전달 시스템'이 된다.
물론 독성과 면역 반응이라는 큰 과제가 존재하지만,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독성을 제거하고, 특정 조건에서만 약물을 방출하게 설계하는 등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생명체와 기계 기술이 만나는 바이오 하이브리드의 대표 사례로, 앞으로의 가능성이 기대된다.
이 기술들은 공통적으로 약물 전달에 특화되어 있다. 단순한 주사보다 더 정밀하게, 정상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부작용은 줄이고. 이는 이미 기존 치료법을 뛰어넘는 혁신이다. 하지만 아직은 외과 수술을 완전히 대체하긴 어렵다. 수술은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기능성 분자'에서 출발한 나노로봇들은 진짜 외과 수술을 할 수 있는 '기계형 수술 로봇'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기술은 누가 만들고 있을까?
2부에서는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는 연구자들과 스타트업들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