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잘러의 순발력
회사인들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직장 생활에 익숙해진다는 건, 나도 모르게 계획을 세우게 된다는 뜻이다. 점점 더 계획을 세우고 계획 대비 성과를 따지는 일에 익숙해진다. 급기야 휴일에도 개인사에 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붙었다. 계획은 100% 그대로 실행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지만, 그래도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막연히 불안하다.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일하는 자세를 배운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런데 반대급부로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 조직에 소속되기 전에는 여행 중에 비가 내려도 마냥 즐거웠다. 갑자기 여행 일정이 바뀌어도 즐길 수 있었다.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오늘 뭐 할지 정하곤 했다.
이제는 다시 우연이 주는 기회를 즐겨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회사 때문에 부득이하게 계획형 인간이 되어 버렸지만, 종종 자기를 돌아보고 유연성을 점검해 보자. 일터에서조차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서점은 최근 발간된 책이나 베스트셀러를 찾기 쉽게 디스플레이해놓는다. 덕분에 내가 원하는 책을 바로 찾기 편하다. 누군가 추천해 준 책이나, 요즘 주목받는 책을 살 때는 서점을 찾는다. 반면, 도서관은 우리의 소비를 고려하고 책을 배치하지 않는다. 도서관은 독자의 구미보다는 체계적인 분류에 신경을 쓴다. 베스트셀러는 으레 누군가 먼저 대출해 가기에 만나기 쉽지 않다.
대신 도서관은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나는 행운을 선물한다.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때는 만날 수 없는 우연이 기다리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손 닿는 대로 책을 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꺼내 본 책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 기회를 얻는다. 평소 관심이 없던 전혀 다른 분야, 독특한 주제의 책을 만난다.
<우연>은 우리의 경험과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 우연이 다양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조직에서 뻔한 일만 하며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되었을 것이다. 우연은 이전에 없던 경험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우연을 단순히 사건이라고만 보지 말고 기회라고 생각하면 좋다.
우리 사회는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실수나 실패를 꺼리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Z세대는 효율적인 활동에 익숙한 세대다. 합리성과 논리성으로 무장한 세대다.
사전에 자신의 일로 정해진 업무 외에 갑자기 생긴 일을 시키면 표정이 굳는다. 일을 처리하는 근본적인 체계를 제대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상황에 맞춰 유연성을 발휘하라고 하면 좀 불편해한다. 빠른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도 함께 키웠으면 좋겠다.
시니어 선배들은 과거 자신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성향을 가졌다. 이제는 더 좋은 기술, 더 좋은 프로세스가 나왔는데도 과거의 성공 방식이 통한다고 믿는다. 경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경험에서 오는 통찰을 기반으로 새로운 방식을 적용하면 폭발적인 성과를 얻을지 모른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세대는 실패를 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일단 부딪혀 보고 실패하면 실패한 원인을 찾으면 되는데 그걸 꺼린다. 학교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디폴트인 시대를 살아와서일까. 실패하면 다시 복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한 듯하다.
시니어는 시니어 나름의, 주니어는 그들 나름의 유연함이 필요하다.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고, 일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튈 때가 있다. 그러면 실무자는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우리는 실수, 실패가 발생했을 때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질책한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좀 더 서둘렀더라면…'
'좀 더 아이디어가 있었더라면…'
불안이 크고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일수록 자기를 존중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쉽게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자신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돌릴 대상을 찾지 않는다. 실패로 열등감, 좌절감, 패배감이 생겼을 때 극복할 수 있는 나만의 보상책을 마련한다. 달콤한 디저트를 먹거나 땀을 흠뻑 흘리는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떠난다.
자기 질책을 시작하면 문제를 확대해서 보게 되기 때문에 그대로의 사실을 보기 어렵다. 자기 질책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면 객관적으로 피드백을 해 줄 수 있는 동료에게 조언을 구하자. 멘털이 무너져 쉽게 빠져 나오기 어려운 때일수록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자.
그리고 도움을 요청했다면 열린 마음으로 끝까지 도움을 받도록 하자.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내게 약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다. 도움받다 보면 내가 작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때 도움을 거절하면 누군가를 통해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도움을 받아 일어서고, 나중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된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우연>을 더욱 존중하게 된다. 인생은 필연보다는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때가 많았다. 세상은 내 생각보다는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점점 겸손해진다. 반드시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일이 틀어질 때는 어떻게 하면 잘 대처할까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회사 일에서나 인생에서나 조금 편해진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