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워터멜론> 리뷰
"있잖아. 누가 더 아픈지 올라가 재 볼 저울은 없어. 판단해 줄 심판도 없고. 누구도 타인의 아픔을 판단할 권리는 없어. 인정 받아야될 의무도 없는 거고. 그냥... 니가 아프면 아픈 거야."
담담히 위로를 건네는 은결이의 목소리에 불쑥 눈물이 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최근 들었던 많은 생각들과 가장 맞닿아있는 말이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종종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말할 때 방어적인 말들을 뱉곤 한다. 엄살인 거 알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거 알지만, 내가 가장 힘든게 아닌 거 알지만-. 본격적인 음률이 시작되기 전 전주처럼 깔리는 그 말들에는 혹시나 나를 '얕은 상처에 고통스러워하는' 엄살쟁이로 보지 않을까, 싶은 의심이 깔려있다.
은결이에게 제 고통을 말하는 은유 역시 그렇다. 은유는 자신이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 부러운 위치에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제가 가진 고민이 타인이 보기엔 부잣집 딸의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더욱이 가장 가까운 모친에게 제대로 아픔을 공감받아본 적이 없으니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는 더욱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혹시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아픔을 털어놓았다가 비슷한 말을 듣게 될까봐. 그랬다가 그 소중한 사람에게 마저 버려진듯한 기분을 느낄까봐.
그러나 은결은 저 짧은 몇 마디의 말로 은유에게 진정한 위로를 건넨다. 너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굳이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고. 그저 네가 아프면 그냥 아픈 거라고. 더불어 그 따뜻한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나는 너의 아픔을 알고 너를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사람일 뿐, 너를 평가하거나 판단하려는 사람이 아니야.
사려깊은 그 말이 유독 와닿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이기도, 가끔은 잊고 사는 말이기도 한 까닭이다. 내 아픔을 누가 저울에 올릴 수 있고, 타인이 가진 고통의 무게를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가늠해본단 말인가. 우리는 그저 각자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아픔은 아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위로는 별 것이 아니다. 그저 타인의 고통을 별 일 아니라 치부하는 경솔함을 뺀 나머지의 말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은결의 이런 태도는 열여덟의 이찬과 청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적용된다. 동갑내기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면서 은결은, 그들에게도 서툴고 아픈 어린 날이 있었다는 것을 체감한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사실은 '나 역시 미처 알지 못했던' 시간들이 존재했다는 것.
자식이 타인이듯 부모 역시 타인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타자화 시키지 못하듯, 자식 역시 부모를 타자화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들이 어떤 시간을 건너와 내 앞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당신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윽박지르던 때가 누구에게든 있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오직 나만이 이해받지 못한다 여기며 답답해하던 날들이.
고통의 시간을 지나 활짝 웃는 청아와 이찬을 보고 은결이 흘리는 눈물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아픔은 결코 수량화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법칙을 가까운 이에게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차마 내가 가늠할 수 없었던 아픔의 무게를 속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결은 이제야 안다. 내 부모의 환한 웃음은 그저 그들의 맑은 성정 때문이 아니라 이 시간을 다 견뎌내고 얻어진 반짝임이었다는 걸. 내가 나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자랐듯, 그들 역시 그들이 묵묵히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돌아보았을 때 가장 빛났고 또 아프기도 했던 시절들이 존재했다는 걸.
수량화 될 수 없는 아픔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빛났던 시절들에 대해 생각한다. 더하여, 지금의 내가 가진 반짝임들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