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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Mar 04. 2021

비 오는 날 라면을 먹으려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보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뜬 시각은 3시경, 한참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인지, 냉장고 소리인지, 가늠이 잘 되질 않았다. 우리 집 냉장고는 계절 혹은 온도나 습도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낸다. 풀숲에 젖은 옷자락을 끌기도 하고, 빗속에 자갈 굴러가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특히 새벽 고요함 속엔 비나 바람 소리를 연상하게 만들 때가 많다. 잠에서 막 벗어나는 내 귀의 환청이 더해진 것이기도 하고, 그 시각 냉장고의 기분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멈춰 있던 냉장고 팬이 가동을 시작하면서 소리의 변별이 생겼다. 빗소리가 맞았다.      


  비 오는 밤은 잠을 설쳐도 기분이 괜찮았다. 어릴 때부터 왜 그렇게 비 오는 것을 좋아했는지, 날이 갑자기 어둑해지고 후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마음의 명도가 바뀌었다. 단순히 밝고 어두운 변화가 아니라 어둑함 속에 밝음이 차올라 치밀해졌다. 차분하면서도 설렘이 이는 일종의 생기였다. 봄날 나무처럼 물기가 오른 어느 한 부분은 점점 선명해졌고, 동시에 막연한 것을 향한 또 다른 부분은 닿을 곳 없이 아득해졌다.

     

  “그때가 처음으로 언니를 발견한 날이었어.”

     

 같이 사는 동생은 비를 좋아하는 나에 대해 어린 날 인상 깊었던 한 장면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내가 열 살, 동생은 다섯 살 정도의 나이였다. 비가 쏟아지는 한밤중 우산을 들고 살금살금 옥외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는 나를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나는 아마도 지붕이 없는 곳에서 비를 느끼고 싶어 나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십여 년이 지나 동생이 문득 그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그날에 대한 내 기억은 희미했다. 동생 말에 의하면 베란다 끄트머리에 서서 우산을 펴고 잠시 빗소리를 듣다 실내로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둘 사이에 '어딜 나가느냐, 왜 따라오느냐' 물음도 없이 마치 무언극 같았던 상황이 동생에겐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비 내리는 아침

   새벽의 비는 날이 밝아올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커튼을 걷어 마당에 자욱하게 쏟아지는 비를 보다가 마침내 때가 왔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미 몸이 먼저 움직여 알맞은 냄비를 찾아 물을 받고 있었다.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리고 안전밸브를 푼 뒤 불을 켰다. 이어 쟁반을 꺼내 수저받침용 돌을 놓고 나무 수저를 그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매끄러운 진행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문짝 아래 칸에 둔 라면을 꺼냈다. 비 오는 날 먹으려고 동생에게 얻어둔 라면 한 봉지. 언제 올지 모를 귀한 때를 위해 냉장고에 보관해두고 있던 것이었다. 동생은 비가 오지 않아도 라면을 즐겨 먹지만 나는 라면을 선뜻 먹지 못한다. 아픈 건 질색이라 건강을 생각해 가급적 멀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 오는 날, 그것도 아주 특별한 기분이 들 때는 어떤 근심도 잠시 접을 수 있었다.  

 

  긴 겨울을 지나 드디어 봄을 알리는 첫 비가 내리는 아침, 라면을 먹기엔 더없이 적당한 날이었다. 기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음악까지 선정해 틀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부른 ‘쓸쓸한 오후.’ 비 올 때면 생각나는 노래지만 실제로 찾아 듣기는 오랜만이었다. 한참 전주가 흐르는 동안 라면에 곁들일 김치를 꺼내기 위해 가만가만 냉장고를 여닫았다. 음소거의 움직임으로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흘러온 연주음이 짙은 먹구름이 되어 모여든 순간, 저음의 목소리가 굵직한 빗방울처럼 툭 떨어지는 것이다. “비 오는 날 플랫폼에서 그대 떠나보내고...” 아, 나왔다. 긴장된 순간은 지나고 노래는 저 나름대로 흘러갔다. 이제 새로운 긴장이 시작될 참이었다. 가스레인지에 다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물은 술렁이며 뜨거운 김과 함께 막 경이로운 기포를 보글보글 올리고 있었다. 이 중요한 순간!  

  “언니 밥 있어?”

  비밀의 문이 열리고 불쑥 동생이 나타났다. 치솟던 흥이 멈칫 내려앉았다. 나는 손에 잡았던 라면 봉지를 조리대 선반 아래로 슬쩍 밀어 넣었다. 동생과 내 집 사이엔 벽 대신 벽장이 세워져 그 속에 비밀 통로가 있다. 두 집 사이를 막은 벽 전체가 벽장인 것이고, 그 안쪽 벽 어느 한 부분을 밀면 상대의 벽장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 구조다. 위급할 때나 오가자고 만든 비밀 문이었는데 어느 결에 음식을 전달할 때 주로 이용하는 문이 되었다.

  “왜 밥이 없니?”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동생과 반찬은 나누어 먹지만 밥은 취향이 달라 각자 해 먹고 있었다. 나는 주로 잡곡을 섞어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을 좋아하고, 동생은 오직 흰쌀밥을 아주 질게 해서 먹는다.   

  “응. 찬밥이 남은 줄 알았는데 없더라고. 근데 언니 혹시 라면 먹으려던 중이야?”

  동생이 냄비 뚜껑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 목소리에 반김이 있었다. 어지간히 라면을 좋아하는 동생이다. 한 끼라도 라면을 덜 먹게 하려고 평소 나는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아니, 누룽지.”

  순간 차분하게 냉장고에 다가간 나는 찬밥 한 그릇과 누룽지가 담긴 그릇을 꺼냈다. 마침 전날 냄비 밥을 하고 나서 긁어놓은 누룽지 한 덩이가 있었다. 단단하게 뭉쳐진 누룽지를 그릇에서 들어내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망설임 없이 집어넣었다. 노릿한 누룽지가 끓는 물에 부드럽게 풀어지며 이내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와, 맛있겠다. 나도 누룽지.”

  동생이 다가와 냄비 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누룽지에 곁들여 도라지 김치와 산나물 무침, 치즈 한 토막을 올려 밥상을 차려주었다. 찬밥 한 그릇까지 알뜰히 챙긴 동생은 땡큐, 만족스럽게 누룽지 밥상을 들고 벽장 속으로 사라졌다. 내 아침밥 역시 누룽지를 먹는 걸로 자연스레 변경되었다. 크게 불만스러운 사태는 아니었다. 라면은 오후로 미루어도 아쉬울 것 없었다. 비는 종일이라도 내릴 기세였다. 아침은 오히려 가볍게 먹는 것이 나았고, 기대가 남았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틀어 놓은 노래처럼 그야말로 비 오는 오후, 누군가 떠나보낸 플랫폼에서 홀로 먹는 라면이 될 것이었다. 운치 있지 않은가!  

라면 대신 누룽지 밥상

   세차게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뀐 건 오후 한 시 즈음이었다. 빗소리가 어째 이상해진다 싶더니 빗방울이 얼어 토도독 알갱이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물 알갱이는 차츰 부피가 커지고 하얗게 부풀더니 함박눈으로 피어났다. 드물게 푸짐한 눈이었다. 빗소리가 그친 세상은 더없이 고요해졌고 오직 흰 눈만이 가득해졌다. 오, 좋아. 나는 생각했다. 날씨와 계절 변화가 뚜렷한 산골은 번번이 낯선 여행지가 되어준다. 비 오는 플랫폼을 서성이던 나는 이제 대설주의보가 내린 산장에 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곧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을 참이었다. 눈 오는 산장에서 먹는 라면만큼 근사한 음식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 산장엔 나 말고 손님이 한 사람 더 있다는 것이었다. 거친 눈보라 속을 뚫고 간신히 도착한 모양새의 비쩍 마른 손님. 공교롭게도 그 손님이 먹고 싶어 한 건 김치전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라면 몰라도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보며 김치전을 먹겠다니, 도무지 내 기준에선 조화롭지 못한 주문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아량을 베풀어야 했다. 군말 없이 김치 밀가루를 꺼냈다. 김치를 잘게 써는 동안 너그러움이 더해졌다. 저마다 눈 내리는 정취에 대한 나름의 기호가 있는 것이다. 함박눈은 더 이상 꽃이 아닌 폭설로 바뀌고 있었다. 아, 저 흰 눈 한 바가지를 퍼다 라면을 끓이는 건 어떨까. 상상이 뻗어갔지만 나는 침묵했다. 그 누구에게도 내 라면에 대해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라면은 모름지기 아무도 모르게 ‘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을 숨기고 최대한 고즈넉이 먹고 싶었다. 김치전 다섯 장을 어렵잖게 부쳐 손님에게 건넸다. 생각보다 위험한 김치전이었다. 보기엔 그럭저럭 김치전인데 냄새가 지나치게 근사했다. 참지 못하고 다섯 장을 더 부쳤다. 결국 배가 불렀다. 하루 두 끼 이상은 먹지 않는 오랜 습성을 지닌 나로선 눈 내리는 산장 라면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오후, 마당에 내리는 눈
우산을 들고 마당 입구까지 나가보았다


  그래서 라면을 도대체 먹기는 하는 건가? 조바심이 나겠지만 성급한 실망은 하지 말기를. 한 번 마음에 둔 라면은 절대 그냥 잊히지 않는 법이다.

  그날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된 눈은 다음날 아침에야 그쳤다. 얼핏 보기에도 20센티가량, 올 겨울 가장 많은 적설량이었다. 창밖은 온통 하얀 설경 그대로 얼어붙었다. 기온은 떨어져 영하 9도. 비상사태였다. 열리지 않는 문을 겨우 밀어 마당으로 나갔지만 사방 두툼한 눈 더미를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목까지 푹푹 빠져드는 눈 속을 걸어 숲에서 기다리는 고양이 밥을 주러 간신히 다녀왔다. 기진맥진 시달렸더니 뭘 맛있게 먹을 생각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 뒤 겨우 입맛이 돌아온 건 다음날 새벽이었다.

  새벽 두 시를 갓 넘기고 반짝 눈이 떠졌을 때 사정없이 배가 고팠다. 비도 눈도 오지 않는 추운 새벽, 냉장고는 홀로 물 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 생각만으로도 생기가 돌았다. 급한 마음에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기로 했다. 라면은 미리 냄비에 얌전히 챙겼다. 꼬불꼬불 복잡하게 얽힌 인연의 갈래 같은 면발, 하지만 어떤 상념도 끼어들 틈은 없었다. 갈색 수프는 다소 거칠게 뿌리다 조금 흘렸다. 상관없었다. 물이 끓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가스불에 냄비를 올려 2분 정도만 더 끓였다. 익숙한 고향, 혹은 어린 시절 비 오던 베란다 같은 뭉클한 냄새가 끼쳤다. 삶은 병아리콩과 붉은 고추, 창가에서 자라던 파 한 가닥을 라면 위에 올렸다.

  드디어 완성!

   어두운 창밖엔 여전히 얼어붙은 설경이 남아 있을 테지만 나는 겨울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 경건히 라면 앞으로 다가들었다.



 

새벽에 먹은 라면. 행복한 맛이었다!


*임재범 '너를 위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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