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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태 Nov 20. 2020

연대(連帶)의 의미와 한계

편견을 넘는 내면의 변화 달성

필자는 30대 중반 미혼 남자이며, 인생의 절반씩을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 서부에 위치한 사립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박사 학위를 최근에 받았으며, 학사와 석사, 고등학교, 심지어 초등학교 저학년과 유치원을 포함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미국의 서부, 중서부 그리고 동부 지역에서 보냈다. 필자는 그래서 스스로를 나름 지미파(知美派) 라고  감히 일컬으며, 비록 지금은 정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조직에 몸담으며 일을 하고 있지만, 필자의 경우 어릴 때부터 미국뿐만이 아닌, 서방 세계의 정치/사회/경제/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다. 


특히 진보 성향의 언론매체에서 연대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영미권 학계 내에서 상호교차성( intersectionality)이란 단어도 많이 연구되는데, 이는 계급/인종/국적/젠더 등 다방면의 영역에서 다른 형태의 억압과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며, 그러한 다양한 억압 및 권력 행사의 접점에 사회의 약자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의 경우, 인종과 젠더 교차점에서 유형 및 무형의 불이익을 받으며, 한국 내에서는 결혼이주민 여성들이 본인 출신 국가(에 대한 한국민들이 편견) 및 젠더로 유사한 교차적 불이익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교차성에 대한 인지와 공감은 아울러 연대 (solidarity)라는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영역, 그리고 사회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최대한의 접점을 찾으며, 공감과 상호 이해의 장을 서로의 인간성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형성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란 곳은,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연대라는 언어를 실제적으로 구현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학연의 중요성이 물론 이전보다는 약해졌다고는 하나, 이는 SKY 등 명문대 졸업장이 예전만큼 고수익 및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자괴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학벌 시스템에 대하여 통렬한 반성과 자기반성이 주된 이유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물론 상당히 많은 회사에서 학벌을 타파하려는 시도는 진정성이 있으며, 필자는 그러한 시도들을 높게 평가하지만). 심지어 같은 인 서울 대학교라 할지라도, 어느 캠퍼스 출신인지에 따라서도 재학생 스스로가 선을 긋기도 하며, 외부인 또한 "그래서 어디 캠퍼스인데" 질문을 하고 답에 따라 평가를 다르게 하기도 한다. 아니,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고도, "모대학 어느 과 나왔어요" 란 답을 듣는 즉시 "아, 서울캠퍼스 아니었구나" 하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지역갈등은 또 어떤가. 예전보다 많이 약해졌다고 볼 수 있으나, 여전히 타 지역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특히 상견례 과정 중 발생한 파혼 소식도 간간이 들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결혼 - 많은 독자들이 공감할 듯한데 - 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각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형형색색(?) 편견 (예: 특정 직업/출신 학교에 대한 편견)들이 커플들의 결혼을 저해하며, 커플들의 결혼 이후에도 부부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출처: https://milkbankne.org/2020/06/we-stand-in-solidarity-with-the-black-community/

필자는 여기서 "편견을 무조건 죄악시하자" 랄지, "모든 편견을 없애야 한다"라는 거창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다 편견은 적던 많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편견의 종류에 A, B, C, D 가 있고, 각각 100의 총량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어떤 이들은 A가 70 정도로 제일 많고, B, C, D는 각각 20 정도만의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이들은 A, B, C, D가 각각 40에서 50으로 균형 잡힌(?) 편견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편견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그다지 없겠지만, 요는 사람 들다 편견으로부터 백 퍼센트 자유롭기는 상당히 힘들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지만, 나름의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편견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서로 공감에 기반을 둔 연대를 지속적으로 한다면 어떨까? 그런 편견들이 현실에서 항상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편견으로부터 드러나는 세상 외 다른 세상(들)이 있다는 걸 겸허히 인정해 나가고, 그러한 과정을 본인과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경험할 수 있는 것. 결과의 이상향은 아니더라도 과정의 이상향으로 충분히, 나름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러한 현대가 편견 자체가 없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충분히 그러한 연대를 하는 이들을 타인은 위선적으로 볼 수 있다. 편견을 없애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언행에서 그러한 편견의 여전한 건재함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에서도 드러나는데, 유권자들은 기본적으로 진보 정치인들에게 보수 정치인들보다 더 높은 잣대를 가지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보수 정치인은 "결집"과 "현상유지"로도 표와 신망을 얻을 수 있지만, 진보정치인들은 안정을 원하는 이들에게 안정을 보장한다 약속하면서, 동시에 플러스 알파로 혁신과 변화의 비전을 제시해야 해서이다. 


필자의 결론은, 어쩌면 홍승은 작가의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와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조금 더 불편하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편견과 항상 씨름하기를. 그것은 본인의 내적의 성장을 보여주니깐 말이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일본인 영문학 교수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말을 인용한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개개인의 깊은 내면의 변화들이 모이는 힘이야"라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은 욕구는 만인이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각자가 편견과 씨름하는 것이 간접적으로도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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