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소설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얼마 전, 자신만의 서재를 꾸며놓고 뿌듯해하는 둘째 언니 집에 갔었다. 성년이 된 아이들이 떠나간 방을 정리하고,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그림 도구들을 작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녀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처음이어서 세 자매가 모여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그날, 오래된 앨범 속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 곁에 없는 엄마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삼십 년쯤 전으로 추정되고, 어느 바닷가였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토막토막 기억되는 그 여름 이야기를 추억하면서 즐거웠다. 기억은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자신의 여섯 번째 소설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출간했을 때, 프랑스 언론은 모디아노가 마침내 이 작품으로 자국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점쳤다. 그 예상은 실제로 들어맞았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현대 프랑스 문학이 거두어들인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 평가받는 모디아노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YES24)
화자인 기 롤랑은 십 년 전 기억상실증으로 위트의 탐정사무실을 찾아왔다가 위트와 함께 탐정사무실을 운영했다. 위트가 은퇴 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을 때 기 롤랑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기로 한다. 기 롤랑이라는 이름과 여권은 위트가 만들어 준 것이다.
기 롤랑은 無에서 추적을 시작한다. 어떤 이들의 희미한 기억, 신문의 부고란에 찍혀있는 이름. 오래된 전화번호, 주소들. 초콜릿이나 비스킷 상자들 속에 처박혀 있던 낡은 사진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 기억을 찾아냈지만 선명한 것은 없다. 자신의 정확한 이름이 페드로 멕케부아 였는지 혹은 지미 페드로 였는지 조차 모른다. 희망을 안고 절친이었던 프레디를 찾아 가지만 프레디는 바다에서 실종된다. 기 롤랑에게는 이제 마지막 시도가 남았다. 로마에 있는 옛 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에 가보는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들은 모두 어떤 기억을 찾아가고 있다. 그가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의 다른 책들에서 해답을 유추해 본다.
“귀에 대고 속삭였던 무수한 말들, 하도 하찮아서 하릴없이 망각되어버린 그 모든 문장의 조각들. 이 모든 말들이 허공에 그대로 걸려 있어, 조금만 침묵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그 메아리를 붙잡을 수 있는 것”『지평』
“완전히 낮이 아닌 시간, 아직 밤이 아닌 시간, 휴식과 고요의 감정이 휩싸니 그때야말로 멀리서 오는 메아리들에 귀를 기울일 시간”『신혼여행』
“과거 속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 그 파동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p.130) 그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우리의 기억속에 담겨있는 말들은 왜곡되었을 수 있다. 그때 내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가 정확하게 기억되지도 않는다. 모디아노는 메아리에 집중한다. 한 때 내가 소중하게 건넸던 작은 목소리, 숨소리, 발자국 소리 같은 작고 여린 소리들의 메아리다. 지나온 삶의 어떤 사건들은 생명을 다할지라도 그것들에 깃들었던 소리들은 허공어디에 남아있다가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 메아리처럼 내게로 되돌아 오는 거다.
나는 어릴 적 살았던 옛 주소 하나를 기억한다. 김부리 291번지. 나의 고향 주소다. 고향을 떠나온 것은 열 살 무렵이다. 거기에는 함께 소꿉놀이했던 친구들과 나의 어린애 시절 발자국들을 남겨두었다. 계속 연결되지 못하는 인연은 쉽게 잊힌다. 먼저 친구들의 얼굴을 잊어버렸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이사는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게 했다. 그러나 때때로 고향의 작은 소리와 냄새들-집앞을 돌아 흐르던 계곡물 소리, 알밤 떨어지던 소리, 겨울밤 산짐승의 발자국소리, 눈내려 쌓이던 소리, 아이들이 웃고 떠들던 소리, 두엄냄새, 옥수수 삶는 냄새-은 메아리처럼 내 기억 속으로 들어온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찾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어느 한 순간의 추억이 아니다. 그가 온몸으로 건너온 한 시대의 향기, 소리, 시간들이다. 결코 흔적으로 남을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분명하게 거기 있었던 것들의 메아리다.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남기는 그 자취의 보잘 것 없음 혹은 ‘無’, 혹은 흩어지는 구름 같은 헛됨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담담한, 그래서 더 절실한 목소리로 서술함으로써 파트릭 모디아노의 최대의 걸작을 만들어낸다.”(김화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