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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갈래의 해방찾기

은유의 독서에세이 <<해방의 밤>>

by 따시

삶의 목표가 인간성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만 친절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p.109


가수 임영웅의 노래 <인생 찬가>를 들어요. ‘지도도 없이 걸어온 삶’과 ‘내일은 처음 가는 길 언제나처럼 또 두려워’라는 가사에 몰입하다가 ‘미안하다 나의 인생아’ 부분에 닿으면 두 팔을 접어 나를 안아주고 있는 손을 발견해요. 태어났고,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며 크느라, 키워내느라 분주했던 내 삶을 진득하게 위로해 주는 노래라서 좋아요. 내 인생에 위로를 건넸으니, 이제는 ‘이전처럼 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단단히 했지요. 삶은 나의 결심과 관계없이 그저 흘러가데요. 속상한 일은 예고 없이 현관문 안으로 들어오고요, 머리를 싸매고 누울 일도 무료하지 않을 만큼 일어나요. 다만 세끼 밥은 먹고 살 만한 주머니와, 아프면 눈치 없이 아파도 되는 시간과, 이전보다 조금 떨어져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노안을 가지게 된 것일 뿐이에요. 이만큼 자라났어도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앞에 놓이면 여전히 두려워요.


40년 직장인 이었다가 퇴직했어요. 나라가 정해놓은 퇴직일이라서 뻗댈 수도 없었네요. 많은 이들이 무얼 할 거냐고 묻곤 하던데 왜 묻는 것인지 의아했어요. 평생 일만 했으니 남은 삶은 좀 놀아도 되지 않을까요? 노트를 꺼내놓고 무얼 하며 놀 것인지를 적었지요.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은 것은 ‘제주 한 달살이’였어요. 꼭 제주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지만요. 낯선 곳에서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차곡차곡 후보지를 찾았어요. 처음엔 바닷가, 그다음엔 강가, 다음엔 산동네로. 반년에 1개월씩 살아보려고요. 남편에게도 반협박으로 동의를 얻어놓은 상태였어요. 물론 저 혼자살이 계획이지요. 남편은 돈을 벌도록 두고요. 우리 때까지만 해도 엄마들은, 아내들은 죽을 만큼 힘들어도 참고 살아내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잖아요. 나는 오롯한 혼자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어요. 아내의 삶, 며느리의 삶, 엄마의 삶을 다 떠나 나의 삶을 살아보는 해방을 맛보고 싶었던 거지요. 은퇴란 내게 그런 삶을 선물해 줄 새로운 세상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노트 속에 빼곡하게 밑그림을 그렸지요. 카페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먹고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요. 그런데 삶이 어디 계획대로 되던가요.


팔십 평생을 혼자 살아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 늙은 나이에 독립을 선언했던 시어머니는 정작 며느리가 독립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셨나 봐요. 은퇴하고 놀기를 시작한 첫날. 고관절 수술로 중환자가 되어 다시 집으로 오셨네요. 미처 피할 수 없는 급류 같은 것이었어요. 준비할 새도 없이 갑자기 간병인이 되었네요. 처음 며칠은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날짜가 흐를수록 몸도 마음도 힘들어지더라고요. 오랜 사회활동의 끝을 종일 집에서 종종거리며 환자를 간병하는 것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남편은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실 생각이 없고 시형제들은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어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시어머니는 내게 떠넘겨졌네요. 멘탈붕괴가 왔지요. 오랫동안 활동해 오던 사회로부터 단절된 소외감. 처음 맞닥뜨린 중환자 간병. 지나갔다고 여겼던 갱년기가 다시 돌아오고. 나는 그때를 삼중고 시대였다고 말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날들이었지요.


어느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웬 늙수그레한 사람이 거기에 있더라고요. 까치집 같은 머리를 하고 축 늘어진 티셔츠에 노숙자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모양새를 한 중늙은이였어요. 정신이 퍼뜩 들더라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멋진 중년이었는데 사람 망가지는 것 잠깐이데요. 노트에 빼곡하게 적어놓았던 은퇴 계획이 무슨 소용이냐고요. 나의 뜻과 상관없이 내 삶은 궁창으로 처박히고 있었는걸요. 더군다나 간병을 하면 낫는다는 희망이 있는 병도 아니고 중증 치매에, 며느리에게만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을 하는 환자를 대하자니 날마다 고역이었네요. ‘나의 해방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우울해지데요. 괜히 눈물도 나고 억울한 생각도 들고.


은유 작가는 『해방의 밤』에서 “사는 방식이 여러 갈래라는 걸 아는 게 해방이죠.”라고 말해요. 내가 있는 이곳에서 어딘가로 떠나는 것만이 해방이라면 나는 절대로 해방을 찾을 수 없는 거잖아요. 다른 방식의 해방을 찾아야 했지요.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방식의 해방 말이에요. 팀 페리스는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아침 일기’ 쓰는 것에 대해 말해요. 세계의 유명 CEO들이 아침일기를 쓰고 있다고요. 그 내용을 읽고 나서 모닝페이지를 쓰기 시작했네요. 사실 은퇴하고 가장 좋았던 일은 아침에 알람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데요. 모닝페이지를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야 하더라고요. 덕분에 자연스레 아침형 인간이 되었네요.

처음엔 팔이 아파 노트 한 면을 채우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나도 모르는 사이, 책을 읽으려고 보니 눈이 침침하고 글을 쓰려고 하니 팔이 아픈 몸뚱이가 되어 있었던 거지요. 천천히 시작했어요. 노트북은 좀 쉽겠지만 지속하는데 제약이 있을 것 같아 아날로그 방식으로 노트에 만년필 글씨를 썼어요. 30일을 지나고 나니 할 만 하더라고요. 아프던 팔도 차츰 나아지고요. 매일 뭘 그렇게 쓸거리가 있었냐고요? 이게 또 이상한 것이 책상 앞에 앉아서 조명등을 켜고 노트를 펴면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이것저것 생각이 나요. 베란다 식물 이야기도 쓰고, 멀리 보이는 하늘과 앞산의 주름에 관한 이야기도 쓰고, 어제 만난 어떤 이에 대한 첫인상도 쓰고,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소설 속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도 쓰고. 그러다 보면 쓸 말이 많아져요. 어떤 날은 속에 쌓여있는 감정을 글로 쏟아냈어요. 남편에게 하지 못할 '시'자 들어가는 이야기도 쓰고요. 나를 잊어가고 있는 사회의 어떤 집단에 관한 이야기도 써요. 쓰다 보면 풀리기도 하고, 선명해지기도 하고, 답이 보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며 위로하다 보니 해방감이 오더라고요. 사람마다 해방감을 맛보는 것은 다르겠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나만의 대나무숲 같은 거예요. 어디 가서 남편 흉 시어머니 흉 못 보잖아요. 결국 그것이 내 흉이 되어버리니. 그런 것들을 아무도 모르는 글 속에 묻어두었지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것이 필수잖아요. 사실 글을 쓰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이 쉽기도 하고요. 도서관의 독서 관련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면서 독서토론도 하고 책도 빡빡하게 읽게 되었어요. 책을 읽는 동안은 또 다른 해방의 시간이 되니 좋더라고요.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읽었던 날도 있었어요. 뜨거운 여름은 책 읽기에 정말 좋은 계절이에요. 우리 몸은 신기하게 들어오는 것이 있어야 내보내요. 많은 작가가 글을 잘 쓰려면 우선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인 거지요. 책 속에서 맛보는 해방도 짜릿해요.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을 좋아해요.

요즘 해방을 맛보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겼어요. 아침 달리기에요. 책읽고 글을 쓰는 일이 모두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은근히 건강이 걱정되더라고요. 매일 챙겨 먹는 약이 하나씩 늘어나기도 하고요. 할 수 있을 때 하려고 아침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참 좋아요. 가끔 모닝페이지와 아침 달리기의 선후를 결정하느라 고민하기도 해요. 달리기는 햇살이 퍼지기 전에 해야 하는데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뜨더라고요. 몸무게가 천천히 줄어드는 것은 덤이에요. 달리는 동안은 숫자만 세요. 무슨 주문 같아요. 땀을 흘리고 나면 머리가 맑아져요. 그게 좋아서 망설이지 않고 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또 어떤 해방을 맞이하게 될까? 기대돼요. 떠나는 것을 포기하고 나니 다른 여러 갈래의 해방이 찾아오데요. 해방은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어떤 환경에서든 나의 마음이 먼저 해방되어야 홀가분하게 온전한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여행도 하게 되고 어딘가에서 혼자 살기를 하면서 해방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때까지는 지금 여기에서 해방을 찾아내며 행복해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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