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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았다

2월의 조각글 모음

by 잼인

1.


2년 전쯤, 앞니 쪽 잇몸에 생겼던 커다란 염증이 드디어 없어졌다. 엑스레이상으로 시커멓게 보이던 염증이 이제는 하얗게 된 모습을 본 의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치료된 건 처음 봐요! 학회에 발표해도 될 정도예요!”


나는 그러냐며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내가 노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얼렁뚱땅 이뤄낸 것에 대해 칭찬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뜻밖의 칭찬에 어색해하며 치과를 나서는데,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노력했든 안 했든 아무튼 칭찬은 늘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일잘러들의 세계에서는 인정 욕구를 경계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내면엔 인정 욕구가 존재한다. 다들 쿨한 직장인인 척하느라 티를 안 내는 것뿐이지.



2.


아주 기분 좋은 날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다녔던 조직에서 같이 일한 선배와 후배를 한자리에서 만났던 날. 같은 팀에서 일하던 우리였지만, 이제는 뿔뿔이 흩어졌다. 같은 시간을 나누던 사이에서 이제 서로 모르는 시간을 알아서 견디는 사이가 된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애틋했다.


아마도, 서로에게 가장 나다운 모습을 까놓고 보여줬기 때문에, 눈물을 들킨 사이였기 때문에 얼굴을 보자마자 뭉클했겠지.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취기가 올라 조금 어지러웠던 와중에 일로 얽힌 사이 중 그렇게까지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보여줄 사람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라고 내 앞날을 예지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게 서로에게 편하다는 걸 깨달아버렸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습관이 생긴 탓일 거다.



3.


몇 년 만에 만난 예전 직장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재민, 옛날보다 뭔가 차분해진 것 같아.”


나는 이 말을 듣고 아주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예전엔 그 선배 앞에서 참 많이 울었고 휘청이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쓴웃음을 지은 채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라고 말하며 그동안 겪은 고난의 시간을 꾹 눌러 담아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나도 이런 내 모습이 낯설고 솔직히 조금은 기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한듯 하면서도 아주 약간의 기대를 품어버리는, 그러나 결국 실망하고 좌절하는, 그런 사람이다. 좌절했으나 좌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어설프게 냉철한 사람 흉내를 낸다. 기대의 대상은 사람, 조직, 사회 등 이것저것으로 변주된다. 가끔 어느 날 밤에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지지만 이내 삼키며, 눈물을 흘리진 않음에 ‘나도 이제 제법 강한 어른이 된 것 같다’라며 뿌듯해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은 영원히 강해질 수 없지 않을까. 그저 어떤 어려운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일 뿐,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일 뿐, 똑같이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한살 한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국 내가 나를 대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는 게 아닐까. 그동안의 시간을 지나오며 이런 것들을 내 안에 정립해 온 것 같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은 언제나 벌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일 것

현실을 살아야 하니, 맞닥뜨렸을 때 감정에 잠식되지 않도록 정신을 부여잡을 것

모든 걸 똑바로 직면할 필요는 없으며, 날 즐겁게 하는 것들을 좇으며 거리를 두기도 할 것



어떻게 끝맺을지 모르겠기에 일단 올리고 봅니다.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어느 날 삭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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