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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퉁, 둥둥, 동동

8, 9, 10월의 조각글

by 잼인

1. 버번위스키, 블루스, 그리고 켄터키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재밌는 우연의 연속으로 나는 조용히 혼자 켄터키 운명설을 주장하게 됐다.


갑자기 웬 켄터키? 켄터키 치킨이 아니라, 미국 켄터키주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자. 대학생 때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 학교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다녀온 적이 있다. 시내에 나가려면 차를 얻어타 한참을 타고 가야 하고, 주변에 아무 놀거리가 없는… 곳이었다. 미드에서 본 것처럼 파티에 가고, 시끌벅적하게 노는 나를 상상하며 떠났지만, 천성이 내향적이라 대체로 방에서 한국 드라마와 예능을 섭렵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뿐이랴. 빨간펜으로 네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코멘트를 받은 에세이 과제를 받고는 서러워하고, 타지살이의 외로움에 사무쳐 울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 켄터키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떠올리면 조금 씁쓸해지는, 애증의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 애증이 내 취향들로 인해 조금 달라지는 중이다. 어쩌면 내가 켄터키주에 갔던 것이 일종의 운명이었지 않을까, 라는 뒤늦은 긍정을 하게 되는 여러 번의 우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중후반, 한참 위스키 세계에 발을 들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솔직히 위스키의 맛이 좋았다기 보단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여서 취향으로 만들려고 한 것에 불과하지만. 여러 위스키를(특히 싱글 몰트 종류) 맛보는 건 값비싼 취미라 결국엔 지속하진 못했지만, 그때도 지금도 가장 자주 찾게 되는 위스키는 버번위스키이다.


버번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재료로, 켄터키주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다. 자, 여기서 1차 우연이 발생한 것이다. 돌고 돌아 가장 내 입맛에 맞는 위스키가 알고 보니 내가 잠깐 머물던 켄터키주에서 생산된 거라니.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땐, 조금 신기해하며 교환학생으로 갔던 당시엔 미국에서 술을 마실 수 없는 나이라 생산지에서 버번위스키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했다.


2차 우연은 블루스다. 최근에 블루스 코드 연주하는 법을 배우면서 블루스에 눈을 뜨며 B.B King의 연주를 많이 찾아 듣곤 했다. 집에서 술 한잔 하면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일대기를 읽다가, ‘렉싱턴’ 지역에서 살았다는 문장을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쯤 되면 운명이네.” 내가 다녔던 학교가 위치한 곳도 ‘렉싱턴’이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내가 잠시 머물던 곳과 30대의 내 취향이 연결되는 듯한 극적인 느낌이었다고 하면, 과장처럼 들리려나.


여기서 우스운 사실을 고백한다.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B.B King의 일대기를 확인해 보던 중, 그가 살았던 “렉싱턴”은 켄터키주가 아니라 미시시피주의 또 다른 “렉싱턴”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같은 이름의 지역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게 어디냐며, 2차 우연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련다. 켄터키 운명설의 근거가 허술해졌으나, 잠시 즐거웠으니 됐다.



2. 조각

가끔 일상 속에서 ‘지금 이 장면은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짧게라도 남겨 놓으면, 나중에 읽고 그때를 떠올리기 쉬우니까 몇 문장으로나마 남겨둔다.


친구가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마지막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송별회를 한답시고 쳐들어간 날이었다. 근처 유명한 보쌈집에서 시킨 야들야들 입에서 녹는 수육을 먹으며 서로의 먹고사는 일을 이야기하고, 디저트까지 배불리 먹고는 다 같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가족들은 제발 그러지 좀 말라며 잔소리를 하곤 하지만, 배부르면 배를 치곤 한다. 그날도 자연스럽게 내가 배를 “퉁퉁” 쳤다. 그랬더니 친구가 “내 배에선 베이스 소리가 난다”며 "둥둥" 쳤다. 이어서 또 다른 친구가 “동동” 배를 쳤고, 세 명의 앙상블 연주로 이어졌다. 퉁퉁, 둥둥, 동동. 이러고 노는 우리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배를 잡고 웃었다. 잠깐이지만, 이렇게 단순하고 철없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음악 페스티벌에서 우연히 피에타라는 밴드의 무대를 처음 봤는데, 기타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아니, 기타가 정말 처연하게 우는 소리를 내서 나도 모르게 팔자 눈썹이 되고,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에 손을 올리고 보게 됐다. 그만큼 무대에 완전히 몰입했던 순간이었다. 감정이 담긴 연주는 이런 것임을 처음 알았다.


친구와 뮤즈 콘서트에 다녀온 날, 셔틀버스를 타고 11시쯤 합정에 도착했다. 평소의 우리라면 졸려서 빨리 집에 갔을 텐데, 흥분감이 가시지 않아 결국 새벽 2시까지 뒤풀이를 했다. 1차로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밥을 허겁지겁 먹고, 2차로는 제비다방에 가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리듬을 타며 수다를 이어갔다. 충격적으로 완벽했던 무대에 우리 둘은 계속해서 각성 상태였고, 이 시간까지 깨어있음에 놀라워했다. 음악의 힘이란!



3. 성취감에 대하여

많은 한국인이 그렇듯 나도 삶에서 성취감이 있어야 만족하는 사람이다. 첫 직장에서는 일에서 그 성취감이 충족되지 않아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뉴스레터를 하며 채웠고, 결국엔 업을 바꾸기까지 했다. 그렇게 업을 바꾼 후에는 새로운 직장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며 성취감이 꽤 많이 채워졌다. 업무 강도가 높긴 했지만, 삶의 만족도는 꽤 높았고 그래서 일 외의 삶에서 성취감을 채우려고 하진 않았다. 누워있거나 술이나 음식을 사 먹으며 짧은 시간 안에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바빴다.


일터도 하는 일도 조금 달라진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일에서 성취감이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 마음 한편에는 불안이 자리 잡고는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삶이 아주 불만족스럽지는 않다. 지금은 부족한 성취감을 기타를 통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버벅거리던 구간을 드디어 연주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의 쾌감이 어찌나 짜릿한지.


예전에는 성취감을 반드시 일에서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의 내가 어리석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때는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사람이었던 거다. 지금의 나는 그때는 몰랐던 걸 깨달으며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며, 일 외의 삶에서 채우는 성취감에 이대로 만족해도 되는 걸까, 더 정확히는 ‘이렇게 살아도 장기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과 저울질을 하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뀐다.





8, 9월은 음악 공연을 즐기느라 기력을 다 썼기 때문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사실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10월에 쓴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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